아테네 시민의 도편(陶片) 추방
에게해의 푸른 바다가 조금씩 노을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수많은 신화를 품고 있는 포세이돈의 바다는 따뜻한4월의 하늘 아래 오늘따라 유난히 잔잔 하다.
뭍에서 멀리 떨어진 먼바다를 지나가고 있는 여객선은 영화 속의 고도(孤島)처럼쓸쓸하다. 다만, 이따금 아득한 수평선 위로 지나가는 배들이 마치 신기루 마냥 아른거린다.
에게해는 신화의 바다다. 호메로스는 헬레네를 납치한 파리스에게 복수하기 위해헬라스의 영웅들과 함께 트로이로 떠나는 아가멤논을 노래했다. 시인은, 또, 트로이를 불태우고 고향 이타카로 향하며 이 바다에서 겪었던 오뒷세우스의 고난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에게해는 인간의 바다이기도 했다.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를 이어 주는 해양의 지배권을 쟁취하기 위해 인류는 문화가 시작되면서부터 치열하게 싸웠다. 당연히, 이곳은 인류사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해상전이 있었던 곳이다.
그리스를 정복하려 했던 부왕 다리우스의 유업을 이어받은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는 6년간의 긴 준비를 끝내고, 드디어, 기원전 480년 대장정에 오른다. 1천여 척의 전함을 이끌고 그리스로 향하는 페르시아 해군의 위용은 금방이라도 세상을 삼킬듯 무시무시했다. 누가 봐도 도시국가 연합 그리스 해군의 운명은 풍전 등화와 같았다.
그런데, 그리스 해군에는 범상치 않아 보이는 장군이 한 명 있었다. 세계 해군사에 독보적 위치에 있는 테미스토클레스다. 아테네의 정치인이자 군인이었던 그는, 페르시아의 침공을 예견하고 끈질기게 정부와 사회 지도층을 설득하며 해군력 강화를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전투가 벌어질 당시, 그리스 군 장교들은 코린토스 해안에서 싸우자는 그룹과 살라미스 해협에서 결전을 벌이자는 측이 양분 되어 치열하게 논쟁을 하고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에서 싸워야 그리스 군이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는 반대파 장교들을 설득하여 끝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기원전 480년 9월, 드디어, 살라미스에서 그리스 연합 해군과 페르시아 해군의 전투가 시작된다.
일설에 의하면, 그리스 측은 "그리스 군은 페르시아 군을 상대할 수 없어 후퇴한다"라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고 한다. 헤로도토스 <역사>에는 테미스토클레스가 "그리스 군은 내분에 휩싸였으니, 곧, 페르시아 측에 투항할 것이다"라는 거짓 정보를 퍼뜨렸다는 기록이 있다.
어쨌든, 전투 개시 전의 긴장된 순간에, 신중해야 한다는 참모들 의견도 있었지만,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는 살라미스 해협으로 돌진하라는 공격 명령을 내리게 된다. 그는 그리스 연합군의 퇴로를 차단 하고 전멸시켜 전쟁을 조기에 끝내겠다는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리스 군은 뒤로 물러섰다. 마침내 페르시아의 전함들이 좁은 살라미스 해협으로몰려들었다. 그런데, 도망치는 줄 알았던 그리스 연합군이, 갑자기, 방향을 돌려 페르시아 군을 맹렬히 공격하기 시작했다. 격렬하게 덤벼드는 그리스 군을 보며 페르시아 군은 크게 당황했다.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크세르크세스는 큰 오판을 한 것이다. 그리스 군은 전통적으로 육박전에 강했다. 따라서, 넓은 바다보다 좁은 해협에서 싸우는 것이 그리스 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이 적중한 것이다.
페르시아 군은 운(運)도 따라주지 않았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함대 제독 아리아비그네스가 전사하며, 페르시아 군은 혼란에 빠졌다. 패색이 짙어지자, 결국, 페르시아 군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 해군은 오백여 척의 배를 잃는, 회복이 어려운 치명적 타격을 입고 패주 했다. 아이갈레오스 언덕에서 이 전투를관람하던 크세르크세스는, 육군과 해군이동시 진격하여 일시에 그리스를 정복하려던 당초 계획이 난관에 부딪쳤다는 것을 알고 크게 실망하게 된다.
이렇게, 그리스 연합 해군은 테미스토클레스의 지휘 아래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크세르크세스는 딜레마에 빠졌다. 제해권을 빼앗긴 상황에서, 전쟁을계속해야 하느냐, 아니면, 철군을 결정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페르시아 군은, 비록, 해전에서 패했지만막강한 육군은 이미 아테네까지 점령한 상태였다. 그러나, 살라미스의 참패를 목격한 크세르크세스는 육군의 승리도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전군에 퇴각 명령을 내리고, 자신도 본국으로 향했다.
페르시아 육군의 퇴로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넘어 소아시아로 가는 길이었다. 당시, 해협에는 페르시아가 그리스 침공을 위해 다리를 건설해 놓았었다. 그리스 연합군 수뇌부는 이 다리 파괴 문제를 놓고 고심을 했다.
이때, 테미스토클레스의 탁월한 지략이 다시 한번 돋보인다. 그는 페르시아 육군의 전력이, 비록 퇴각하고 있지만, 그리스 연합군을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퇴로를 끊고 양군이 전면전을 벌일 경우 그리스 군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자칫, 페르시아 군에 승리를 안겨 주어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반대파들을 설득한 후, 전쟁 포로로 잡은 아르나케스라는내시(內侍)를 통해 크세르크세스에게 아래와 같은 전갈을 전한다.
"그리스인들은 제해권을 장악한 만큼 헬레스폰토스로 항해하여 그곳에 놓여있는 다리를 해체하기로 결정했소이다. 그러나, 나테미스토클레스가 그대를 염려하는 마음에서 충고하건대, 그대는 서둘러 바다를 건너 고향 땅으로 돌아가시오. 그사이 나는 그리스 연합군을 온갖 방법으로 지연 시키며 추격을 늦추도록 할 것이오."
페르시아 왕은 이 말을 듣자 간담이 서늘해 부랴부랴 철수에 박차를 가했다. 훗날, 역사가들은 테미스토클레스의 결정은 현명했고, 자칫 모든 것을 잃을 뻔한 전쟁을 승리로 끝맺게 했다고 평가했다.
아테네의 중서부에는 넓은 평지 아고라(Agora)가 있다. 고개를 들면 아테네의 상징과 같은 아크로폴리스의 웅장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집결지(集結地)라는 뜻을 갖고 있는 아고라는 군의 징집과 정치인의 연설 장소 그리고 후에는 시장으로사용되었다.
아고라에서는 드물게 특별한 민회(民會: ekklesia)가 열렸다. 아테네 시민들이 정치인들 중 정계에서 쫓아내고 싶은 이름을질그릇 조각(Ostrakon)에 적어내 그를 추방하는, 이른바, 도편추방(Ostrakismos) 을 실행하기 위한 모임이다. 오늘날, "외면 하다, 배척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영어 어휘 오스트러사이즈(Ostracize)의 어원이기도 하다.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후 10여 년이 흐른 기원전 472년 이곳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아테네 시민들이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에게 도편추방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의 재산을 몰수하고 10년간 아테네를 떠나라는 시민의 명령이었다.
정적들의 모함도 있었지만, 아테네 시민들은 전쟁 영웅으로 승승장구하는 그의 성정(性情)이 충동적이고 야심이 많아 독재자 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저자 플루타르코스는 그때의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침내 아테네 시민들은 테미스토클레스를 도편추방하여 그의 명성과 권위를 훼손 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의 권세가 압도적이어서 민주주의적 평등과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겨질 경우 으레 행하던 일이었다."
아테네에서 추방된 테미스토클레스의 삶은 고단했다. 스파르타를 시작으로 이곳저곳을 떠돌다 절망적인 상황이 되자 나중에는 그의 적이었던 페르시아 왕에게 자신의 일신을 맡기는 신세가 되었고, 끝내,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무덤에 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는데, 기원전 3세기 그리스의 지지 학자(地誌学者) 디오도로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무덤이 페이라이에우스 항구 알키모스 맞은편에 있다고 주장하며 아래와 같이 노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