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케네(Mycenae)의 왕자 오레스테스(Orestes) [5]
우리는 가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통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귀신을 보고 놀라는무당이나 점쟁이들을 볼 때가 있다.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자비로운 여신들>의 시작이 그와 비슷한 장면이다. 델포이의 아폴론신전에서 신탁을 받기 위해, 신전안으로 들어갔던 예언녀가 질겁을 하며 밖으로 뛰어나온다.
예언녀는 조금 전 한 사내가 피 묻은 칼과올리브나무 가지를 들고 탄원자의 자세로 대지의 배꼽(옴파로스)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예언녀가 신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무시무시한고르고 자매를 닮은 한 무리의 노파들이잠에 곯아떨어져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그들은 오레스테스를델포이까지 쫓아왔던 복수의 여신들이었다. 신전안까지 들어온 그들은, 그러나 아폴론 신의 강력한 힘에 의해 깊은 잠에빠져버린 것이다.
비극 <자비로운 여신들>에서는 아폴론 신과 아테나 여신이 직접 전면에 등장한다. 특이한 것은, 이 비극의 코로스가 오레스테스를 파멸시키려는 복수의 여신들로 구성 되어 있다.
복수의 여신들이 잠들어 있을 때 아폴론이 오레스테스 앞에 나타났다. 아폴론은오레스테스에게 복수의 여신들을 제압하고구원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알려준다.
아폴론: 그대는 계속 달아나지 말고 나약해지지 말지어다. 그들은 바닷물에 둘러싸인 도시들을 지나 끊임없이 그대를 뒤쫓을 것이니라. 그러나 고난의풀밭으로 내몰리더라도 미리 지치지 말고, 팔라스의 도시(아테네)로 가서탄원자로 앉아 여신의 오래된 신상을껴안도록 하라. 명심하라. 공포가 그대의 마음을 제압하지 못하게 하라.
아폴론은 전령의 신 헤르메스에게 오레스테스를 아테나 여신의 신전까지 안내해 줄 것을 부탁했다. 헤르메스가 오레스테스를인도하며 아테네로 떠난다.
오레스테스가 떠난 잠시 후, 잠자고 있는 복수의 여신들 옆에 클리타임네스트라의혼백이 나타난다. 혼백은 그들을 깨우며 빨리 그를 쫓으라고 좨쳤다.
클리타임네스트라 혼백: 그대들은 자고있나요? 자면 어떡해요? 녀석이 그대들에게서 벗어나 새끼 사슴처럼달아나고 있어요. 이 어미를 죽인 오레스테스는 떠나고 없단 말예요. 일어나세요! 자, 뒤쫓아가 두 번째추격으로 녀석을 쓰러뜨리세요.
코로스(복수의 여신들)가 잠에서 깨어나며혼백은 사라진다. 여신들은 자신들을 잠재운 아폴론을 비난하며 원망한다.
코로스: 아아, 이럴 수가! 우린 당했어요. 아아, 슬프도다. 우리는 비참한 고통을 당했어요. 덫에서 빠져나갔어요. 그 사냥감이.
아아, 제우스의 아들이여, 교활한도둑이여(아폴론). 그대는 젊은 신으로서 연로한 여신 들을 짓밟고 탄원자를, 무도한 인간을, 제 어미의 원수를 존중하고 있어요.
아폴론이 조용히, 그러나 강력한 어조로코로스를 꾸짓는다.
아폴론: 나가시오. 명령이오. 어서 이 집에서 물러가고 이 예언의 성소(聖所)를떠나시오. 여기 이 집은 그대들이접근할 곳이 아니오.
아폴론의 떠나라는 명령을 받자 코로스장은 거칠게 항의를 했다. 오레스테스의 죄를 두고 그렇게 한참 동안 신들의 다툼이 이어졌다.
코로스장: (어쨌든) 나는 녀석을 벌주기 위해 뒤쫓을 것이고 사냥하여 쓰러뜨릴 것이오. 아폴론: 그러나 나는 탄원자를 도와주고보호할 것이오.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3부작의 피날레와 같은 <자비로운 여신들>의 마지막 무대는아테네다. 헤르메스의 인도를 받아 오레스테스는 아테나 여신의 신전이 있는 어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왔다. 신전 안으로 들어간 그는 아폴론의 지시대로 여신의 신상을껴안고 탄원을 한다.
오레스테스: 아테나 여왕이시여, 나는 록시아스(아폴론)의 명으로 여기 왔나이다. 그대는 이 탄원자를 호의로써 받아 주소서.
얼마 후, 오레스테스를 쫓는 복수의 여신코로스도 아테나 신전에 나타난다. 신전에 들어서며 그들은 오레스테스의 흔적을찾았다며 기뻐했다. 코로스는 마치 사냥개 가 새끼 사슴을 찾듯이 신전의 여기저기를기웃거리며 돌아다녔다. 오레스테스는 신 상을 붙들고 침묵을 지키며 아테나 여신에게 구원을 기원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테나 여신이 무장을 한 채 나타난다.
아테나: 그대들은 대체 뉘시오? 그대들모두에게 묻는 말이오. 내 신상 옆에 앉아 있는 저기 저 이방인(오레스테스)과, 태어난 존재들의 어느 종족과도 같지 않고, 신들이 보아온 여신들축에 끼지도 않으며, 그 생김새가인간들과도 비슷하지 않은 그대말이오. 코로스장: 제우스의 따님이여! 우리는 밤의 영원한 딸들이며, 지하에 있는 집에서는 '저주'라고 불리지요. 우리는 살인자를 집에서 내쫓는 일을 한답니다. 저자는 자기가 어머니를 죽일 자격이 있다고 여긴 잡니다. 뛰어난 지혜를 가진 그대가 공정한 재판을 해주시오. 아테나: 지금 그대들은 이 소송의 판결을 내게 맡기는 것이오? 코로스장: 그럴 수밖에요. 그래야만 존경스런 분에 걸맞게 존경할 수 있겠지요. 아테나: 이방인이여, 다음은 그대 차례니라. 이에 대해 그대는 무슨 말을 하려는 가? 그대는 먼저 그대의 고향 가문, (겪고 있는) 불행을 말하라.
먼저, 오레스테스는 자신은 오염된 손을 갖고 온 탄원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트로이 전쟁의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아들이라고 말하며, 아버지가 전쟁에서 돌아온 날 밤 일어났던 끔찍한 일을 이야기했다.
오레스테스는 당시 타향에 있다 돌아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고 주장했다. 그 일은, 또, 아폴론의 명령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그는, 복수의 여신과 같이, 판결은 지혜의 여신 아테나에게 맡긴다고 했다.
판결의 요청을 받은 아테나 여신은, 그러나 의외의 결정을 내린다. 아테나는 오레스테스를 정화된 탄원자로 받아들이지만, 복수의 여신들의 의견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테나는 이 중대한 사건을 자신이 아닌 아테네 시민들이 판결토록 한다고 선언했다. 시민들이 뽑은 배심원이 판결토록 한 것이다. 아테나는 오레스테스와 복수의여신들에게 재판장에서 도와줄 조력자와증인과 증거들을 모으라고 요청했다. 재판 은 아테네 시민 법정인 아레이오스 파고스에 열린다.
드디어 아레이오스 파고스에서 재판이시작되었다. 아테나 여신이 전령을 앞세우고, 배심원들로 뽑힌 11명을 포함한 수많은 시민들을 대동하고 등장한다. 나팔소리가 울리자 재판 당사자는 모두 자리로 돌아 가고, 이어서 아폴론이 등장하여 오레스테스 옆에 앉았다.
재판이 시작되며, 아레이오스 파고스 법정에서는 오레스테스의 죄에 대한 열띤 공방이 계속되었다. 엄격한 벌을 내려야 한다는 복수의 여신들과 이를 꾸짖으며 오레스테스를 보호하려는 아폴론의 변론이 법정을뜨겁게 했다.
아테나 여신이 배심원들에게 투표를 명령했다. 2500여 년 전 한 비극 작가에 의해 쓰인 아테나의 선언은 오늘날 부패한 법조인들을 부끄럽게 하는 명문이다.
아테나: 내가 지금 창설하는 이 배심원은뇌물에 매수되지 않고, 존경심을 불러 일으키고, 잠자고 있는 자들을 위해 이 나라의 불침번이 되리라. 이제 그대들은 일어서서 투표석을 집어 들고 가 선서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시비를 가리도록 하라.
배심원들이 한 명씩 제단으로 다가가 항아리에 투표석을 던져 넣었다. 투표가 끝난 후, 배심원 2명이 앞으로 나와 항아리에서투표석을 쏟아놓고 계표를 시작했다. 아테네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드디어, 아테나 여신이 판결을 내린다.
아테나: (오레스테스를 가리키며) 여기 이 사람은 살인죄를 벗었노라. 투표석이 가부 동수이기 때문이니라.
투표석 개표 전, 아테나는 가부 동수가 되면 자신은 오레스테스 편을 들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오레스테스는 감격하여"아르고스는 아무리 강력한 나라가 돼어도 결코 아테네를 침공치 않을 것이며, 만약후손들이 이를 어길 시 무덤에서라도 응징하겠다."라고 맹세를 했다.
오레스테스: 오오, 팔라스(아테나)여, 내 집의 구원자시여. 고향 땅을 빼앗긴 나를 그대는 내 집으로 복귀시켜주었나이다.
아폴론과 오레스테스는 아레이오스 파고스법정을 떠났다. 그러나 재판의 결과를 지켜본 복수의 여신들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며 아테네를 저주한다.
코로스: 아아, 젊은 세대의 신들이여, 그대들은 옛 법을 짓밟으며 내 손에서 빼앗아 가는구려. 가련한 나는모욕당하여 깊은 원한을 품고 여기 이 나라에 독을 아아, 복수의 독을 나의 심장에서 내뱉노라.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자비로운 여신들> 의 하이라이트는, 어떻게 보면, 아폴론과 오레스테스가 떠난 후 아레이오스 파고스 언덕에서 일어난 복수의 여신의 극적인변신이라고 할 수 있다.
아테나 여신은 아테네를 저주하는 복수의여신들에게 우선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경고했다. 아테나는 정의로운 도시 아테네의 지하에 은신처를 준비하고 왕좌를 만들어 줄 테니 그곳에서 시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지내라고 설득했다.
아테나는 자신의 도시 아테네가 불의와부패로 타락하지 않기 위해서 복수의 여신들의 역할이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완강하게 거부하던 복수의 여신들은 아테나 여신의 진심 어린 설득에 차츰 마음을가라앉히고 원한을 풀었다.
가장 정의로운 아테나가 가장 적의적인 복수의 여신을 설득하여 아테네에 머물게 한 것이다. 놀랍게도 아테네 여신은 복수의여신들을 위해 축원하고, 아테네 시민에게 그들을 호의로 대접할 것을 당부했다.
아테나: 무섭기만 하던 여신들의 얼굴에서 이곳 시민들에게 큰 이익이 생기는 것이 보이는구나. 호의적인 여신들에게 그대들의 호의에서 변함없이 큰 경의를 표한다면, 그대들은 나라와 도시를 바른길로 이끌며 모든 면에서 영광을 누리게 되리라!
복수의 여신들은 아테네가 재앙과 같은당파 싸움으로 날뛰지 않고, 범죄와 살인이없으며 우정으로 하나 되기를 기원한다. 그렇게 아테나 여신의 위대한 포용에 의해 "복수의 여신들"은 "자비로운 여신들"로거듭나 아테네 도시를 위해 축원하며 비극은 막을 내린다.
코로스: 편안하시라. 그대들 몫으로 주어진부(富) 속에서! 편안하시라, 그대들 도시의 백성들이여, 제우스 옆에서거주하는 자들이여! 여기 사랑스런처녀에게 사랑받는 제때에 현명해진자들이여! 팔라스가 날개로 덮어주는자에게는 그녀의 아버지도 호의를 보이는 법이니라.
초여름 파르나소스 산 하늘은 푸르다. 어머니를 찌르고 미케네 궁전에서 이곳델포이까지 아폴론을 부르며 단숨에달려왔던 오레스테스가 저기 대지의 배꼽옴파로스를 붙들고 탄원하고 있는 듯 하다.
그를 뒤쫓아 왔던 복수의 여신들이 아폴론의 강력한 힘 앞에 맥없이 잠들어 버렸던신전은 수천 년 풍상에 집터만 남아 있다. 그러나 지금도 한 쪽에 우뚝 서 있는 신전의 기둥은 이곳 델포이의 주인인 아폴론의 기상을 보여 준다.
계곡을 따라 광대하게 펼쳐진 올리브 숲너머에는 아득히 코린토스 만 바다가 보인다. 그 바닷길을 따라가다 보면 아르고스 미케네 궁전이 있었다. 금방이라도 제우스가 날렸던 독수리가 창공을 날을 듯한 이곳 파르나소스 산 델포이는 신화의 땅이다.
새벽같이 숙소를 나와 델포이에 왔는데, 해 질 무렵 다시 아테네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오레스테스는 하늘을 나는 전령의 신 헤르메스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서 아테나 신전으로 갔다. 지금 그 길을 나는 버스를 타고 따라가고 있다.
아테네의 아침 공기가 상쾌하다. 한낮의더위를 피하고 싶은 많은 관광객들이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오르고 있다. 나도 조금 서둘러 파르테논 아테나 신전에 들렸다가 아레이오스 파고스 언덕을 향해 걷고 있다.
아크로폴리스 서북쪽에 있는 아레이오스 파고스 언덕은 석회암 바위로 이루어진야트막한 동산이다. 그러나 이곳은 고대 그리스 대법원이었다. 또, 아가멤논가의 비극을 읽은 독자들에게는 이곳은 분명히 특별한 여행지 일 것이다.
탄탈로스, 펠롭스, 아트레우스, 아가멤논 그리고 오레스테스로 이어지던 질기고잔혹했던 저주는, 오레스테스가 아폴론과아테나에게 눈물로 탄원하며 여기 아레이오스 파고스에서 집안의 저주를 끊고 자신도 정화를 받는다.
아가멤논가의 신화를 따라 걸어왔던 내 긴 여정도 이곳 아레이오스 파고스 언덕에서 걸음을 멈춘다. 트로이 평원, 에게해의뱃길, 코린토스 미케네 앞 바다, 델포이의 푸른 하늘, 아테나 신전.... 이제 내가 만났던 그 신화의 장면들은 조금씩 빛이 바래며추억이 되어갈 것이다.
김종호
• 위 글은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아이스퀼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에서 인용한 부분이 있다.
• 사진 설명: (위) 파르나소스 산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신전터의 기둥/ 팬데믹 전 방문시 찍은 사진이다. (아래) 아레이오스 파고스 언덕/ 위로아크로폴리스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