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5월 앞에 서다
시인들이 계절의 여왕이라노래하는 5월이 올해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라일락 꽃이 지고 아카시아향기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햇빛 찬란한 시절이다.
이제, 장미가 꽃봉오리를터뜨리고 담벼락을 붉게 물들이며 여름을 재촉하는 계절이다.
3년 전 나는 5월을 프랑스를 여행하며 보내고 있었다.
파리 시내를 걷던 어느 날, 에펠탑 전망대에 올라 여름의 문턱에 있는 나른한 파리의 오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마천루와산이 없는 파리의 모습은 특별한감흥을 주지 못했다.
별로 높지 않은 몽마르트 언덕이 마치 서울의 남산처럼 당당하게서 있다.
이렇게 무심히 도시의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한 초로의 노신사가 말을 걸어왔다.
인도인으로 보였다.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후, 자연스럽게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 후, 부인들도 인사시키며무료한 한낮의 시간에 활기를 불어 넣어보려 애썼다.
부부가 여유롭게 외국 여행을 하는 것을 보면 인도에서는 상당히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대화 중에 풍기는 그의 어휘 속에서 높은 학식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이야기 중에 "We have a lot of things to learn from Korea."라는 말을 수차례나반복했다.
"인도는 한국에서 많은 것을배워야 한다"라는 이 말의 속 뜻을 처음에는 정확하게 파악 하지 못했지만, 대화를 이어 가며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
"군사독재에 항거하며 이룬 민주화와, 그 이후 이런 토양 위에서만들어낸 정치, 경제, 문화의 다이나미즘(Dynamism)"을 부러워 하고 있었다.
그 부부와 헤어진 후, 숙소로 돌아오는 길 내내 여러 가지 생각들이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우리가 이룬 민주주의가 마치 내 것인 양떠들었던 일들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숱하게 있었던 시위에 참여한 일도 없고, 어떤 민주화 운동에 몸담았던 적도 없다.
그러니, 내가 떠들고 자랑할 일이 아니다.
세상사(世上事)는 참 묘(妙)하다.
우리세대가 한참 일할 때 최고의 지상목표는 극일(克日)이었다.
열심히 일하고, 연구하고 그리고 투자 해서 일본을 따라잡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을 뛰어넘는 극일은 전혀 상상도 못했던 다른 곳에서 왔다.
부마 민주 항쟁, 5.18 광주 민주화운동 그리고 6월 민주 항쟁으로 이어지며 완성된 민주주의다.
나는 정치인, 외교관 그리고 역사학자도 아니다.
그냥 상당 기간 여러 나라를 떠돌던여행자였다.
그러나, 내가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며 얻은 경험으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
우리가 피 흘려 이룩한 민주주의가 없었다면, 삼성 갤럭시, 현대 소나타, BTS 그리고 영화 패러사이트는 단언컨대 없다.
말하지 않아도 세계인들의 마음속에는불의에 도전했던 우리의 다이너미즘을동경하고, 상품 하나하나에서 그 문화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한 번도 권력에 맞서 싸워보지 못한 일본의 민주주의는 사이비다.
이렇게 우리는 극일의 문턱을 넘어섰다.
그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준 민주화 운동의 투사들에게 우리는 그래서 빚진자들이다.
파리에서 돌아온 다음해 어느 봄날 초등학교 친구들 몇 명과 망월동 민주묘지를 찾았다.
초라한 내 마음이 조금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혼잣말을 해봤다.
"외롭게 꽃잎처럼 흩어진 그대 5월의 생명들이여 죽음 결코 헛되지 않으리민족의 맥이 뛰고 있는 한 그대 불멸의 전사되어이 땅의 빛이 되리라 이제, 노여움을 거두시고영면하시라산자들이 그대들이 걸었던 길을 따르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