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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Istanbul) 뒷골목의 흐린 주점 을 찾아서

가끔 지인들로부터 신화를 공부하고 싶은데 무슨 책부터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아무래도,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에게는 딱딱한 고전(古典)보다는 쉽게 풀어준 이야기책 같은 종류가 더 유용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면에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초보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2000년 첫 1권이 출간되며 신화열풍을 일으키기도 했던, 이 시리즈는 5권을 끝으로 중단되어 미완(未完)의 작품이라는 아쉬움을남겼다.

2010년 이윤기 작가가 63세의일기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의 저서 5권 서문(序文)에는이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이스탄불의 흐린 주점" 이야기가 있다.

그는 흐린 주점이라는 말을 황지우 시인의 시 <어느 날 나는 흐린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에서 살짝가로챘다는 다소 익살스러운 말도 잊지 않았다.

나도 그의 책을 읽다 낯익은 구절(句節) 같아 책장 속의 많지 않은시집들을 뒤져봤다.

녹색 표지 노란 네모칸에 제목 이 인쇄되어 있는 황지우 시인의시집이 있었다.

큰 관심 없이 지나쳤던 시를 다시 한 번 읽어 봤다.

눈에 들어왔던 그 시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 부대를 걸치고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먼 눈으로 술잔의 水位만을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이윤기 작가는 일행들과 함께 늦겨울 비가 주적주적 내리는 이스탄불의 한주점에서 터키의 술 "라키"를 마시며 깊은 상념에 잠겼던 시간을 잊을 수 없다고 적었다.

그는 "당시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 관련한 책을 네 권이나 쓰고 수 십 권이나 번역 했지만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라고고백했다.

그는 그 흐린 주점에서 해답을 찾았다.

"현장의 체험 없이 활자만 보고 쓴 책이 무슨 생명이 있었겠느냐"라는 결론에이른 것이다.

그 뒤, 이 작가는 카메라를 메고 그리스 신화의 현장은 물론 유럽의 여러 박물관 까지 이곳저곳을 흗고 다녔던 것 같다.

그렇게 탄생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신화"는, 당연히, 이전의 책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동감 있는 작품이라고 여겨진다.

그의 신화 여행은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시작되었다.

터키는 고대시대 때에 그리스 문화권에속한 지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로마 제국 건설 당시 그리스의 많은 유물들이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옮겨졌기 때문에 신화 여행을 하려는 사람들에게는놓칠 수 없는 곳이다.

나도 2년 전 한 달 동안의 그리스 여행을 이스탄불에서 시작했다.

이스탄불에서 숙소는 가능하면 교통, 상업관광의 중심지인 탁심 광장(Taksim Squ- are) 근처의 보스포루스 해협이 보이는 곳에 잡으면 좋다.

유럽에 앉아 아시아를 바라보는 조그만호사는 덤이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흑해로 가는 초입(初入)이다.

아시아와 유럽을 가로지르는 이 바닷길은 많은 역사와 신화를 품고 있는 곳이다.

제우스와 정을 통한 이오가 제우스 부인헤라의 박해를 피해 소(牛)로 변신해도망치고 도망쳐 건너간 곳이 이 바다다.

보스포루스 말 자체가 소(Bos)가 건너간여울(Phorus)이라는 그리스어다.

그러나, 이 흑해 골목 물길의 진정한주인공들은 이아손을 대장으로 한" 아르고 원정대" 용사들이다.

그리스인들은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머나먼 흑해 연안의 콜키스 땅으로 금양(金羊) 모피를 찾아 떠났던 영웅들의 이야기를 무척 사랑한다.

비록 도중에 하선(下船)을 했지만 천하장사 헤라클레스, 스파르타의 역사(力士) 폴리테우케스, 여걸 아탈란타, 칼뤼돈의멧돼지를 잡은 호걸 멜레아그로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아버지펠레우스...

이런 신화 속 50여 명의 영웅호걸들이아르고나우티카(아르고 원정대 이야기) 의 주인공들이다.

숙소의 베란다 창밖으로 펼쳐진 해 질녘 보스포루스 황금색 물결은 신화 속의아르고호가 흑해를 향해 미끄러져 가는 모습이 보이는 듯 아름답다.

이스탄불에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면탁심 광장에서 갈라파 대교로 향하는이스티크랄 거리는 젊은이들과 관광객으로 활기가 넘친다.

장난감 같은 빨간 전차가 천천히 오고 가는 이 거리에서 낯선 밤의 정취에 취하며 나도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이스티크랄 대로에서 뒷골목으로 방향을 바꾸어 도시의 은밀하고깊숙한 곳까지 들어섰다.

어둠이 내린 밤중에 이국(異國)의 도시의 미로(迷路)를 걷는 것은 아무래도달갑지 않다.

그러나, 이스탄불에서는 꼭 한번 걷고싶었다.

어둑어둑한 골목 안에서도 사람들은빵을 굽고, 포장을 하고, 짐을 나르며부지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끔, 가라오케(Karaoke) 간판도 눈에띄며, 우리네 선술집 같은 조그만 가게들이 연한 붉은색 불빛 아래 줄지어 있다.

이윤기 작가가 이 도시의 골목 흐린 주점에서 라키를 마시며 상념에 잠겨 있을 때는 늦겨울 비가 왔었지만, 지금 이스탄불은 장미와 오랜지 꽃 향이 코 끝을 스치는5월이다.

아직, 찾아갈 곳이 많이 남아 있고 쓸 것이 쌓여 있었을 텐데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야 했던 그가 못내 아쉽다.

그러나, 살아있는 글을 쓰기 위해 아크로폴리스를 수도 없이 오르고, 아프로디테의 신전을 찾아 코린토스를, 아르테미스여신을 떠받들던 스파르타를, 헤라 여신의 신전을 찾아 올림피아를 그리고 델포이와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궁전까지 헤매고 다녔던 그의 뜨거웠던 열정은 부럽다.

금양 모피를 찾아 머나먼 흑해로 떠났던아르고나우티카의 주인공들처럼, 나도 신화의 흔적을 더듬으며 긴 여행을 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느다란 떨림을 느끼며네온 불빛 외로운 이국의 밤길을 걸었다.

이스탄불의 흐린 주점이 있는 골목에도인적이 드물어지며 밤이 깊어 간다.

김종호

*위 글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인용한 부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