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2,415자·4분 남짓

산 마르코 광장(Piazza San Marco) 앞에 섰던 두 사람

베네치아는 자동차 길이 없는 수로(水路)로 연결된 수상 도시다.

코로나 팬데믹이 오기 전에는,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이 독특한정취 때문에 관광객들이 늘 넘쳐났다.

여행객들은 베네치아에 오면 어김없이수상버스나 곤돌라(Gondola)를 타며 아름답고 특별한 이 풍경을 즐긴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유럽 어느 도시보다아기자기한 골목길이 많은 곳이다.

거미줄처럼 연결된 골목들은 비슷한 것 같지만 나름대로 자기만의 이야기와특색을 갖고 있다.

배낭여행자들에게 "여행 중 잊지 못할추억 하나만" 꼽으라고 물으면 "걷다가 길을 잃은 일"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베네치아는자유여행자들에게는 언젠가 꼭 한 번은 들려야 할 데스틴에이션(Destination) 임이 틀림없다.

광장문화에서 시작했던 유럽의 대부분 도시가 그렇듯이, 베네치아도 길을 걷다보면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이 지역의상징과도 같은 광장을 만나게 된다.

산 마르코 광장이다.

그리스 헬레니즘과 기독교 히브리즘 문화의 터전에서 형성되었던 유럽 도시 들은 동양과 달리 자기들만의 수호신(守護神)을 갖고 있다.

한적한 어촌 마을로 조용히 살아가던베네치아인들은 9세기에 접어들어, 상인(商人)들을 중심으로 아드리아해의해상 상업권을 장악하며 강력한 도시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게 된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자신들의 수호신을찾게 되었다.

이런 의도를 갖고 있던 베네치아 상인 들은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에서산 마르코 시신(屍身)을 훔쳐 오게 된다.

산 마르코는 우리에게 마가복음을 기록한 인물로 알려진 성자(聖者) "마가"의이탈리아어 이름이다.

베네치아인들은 성당을 지어 산 마르코 의 시신을 안치하고 그 앞에 아름답고 웅장한 광장을 만든 후, 산 마르코가 그들의 수호신임을 세상에 알렸다.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 목적지는 로마였다.

그가 로마에 가기 전에 이탈리아 북부 다른 도시, 밀라노나 피렌체보다 비교적 긴 15일가량을 베네치아에 머문 데에는 이유가 있다.

괴테의 어린 시절 프랑크푸르트 집에는 아버지가 이탈리아 여행 중 베네치아에서 사 온 곤돌라 모형을 진열해 놓고 있었다.

그는 그 곤돌라를 보며 베네치아의 풍경을 꿈꾸었다.

베네치아에 도착하며 괴테는 "소년 시절의 기억을 맛볼 수 있었다"라는 특별한감회를 그의 작품 <이탈리아 기행>에 기록하고 있다.

괴테는 1786년 9월 28일 저녁에 베네치아에 도착하여 산 마르코 광장 근방에에 있는 "영국 여왕"이라는 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산 마르코 광장 앞에 섰을 때 그는 그의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세계의 어떤 광장도 산 마르코 광장 앞에 펼쳐진 공간에 비견될 수 없다."

그의 기행문의 아래와 같은 구절을 보면, 괴테도 베네치아의 골목길에 깊이매료되었던 것 같다.

"안내자도 없이 다만 방향만을 주의하면서 시내의 미로(迷路) 속에 들어섰다." "나는 아무에게도 길을 묻지 않고 스스로의 방향감각만을 의지하며 미로 속을들락날락했다."

괴테는 베네치아의 많은 건축물들 중에서, 특히, 산 조르지오 섬에 세워진 안드레아 팔라디오가 설계한 산 조르지오마조레 성당의 아름다움을 직접 보고 싶어 했다.

그는 성당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내가 여기 온 것은 안드레아 팔라디오에게경의를 표하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괴테는, 또, 밝고 화려한 베네치아 화풍(畫風)의 많은 그림들을 감상하고, 달빛아래서 곤돌라를 타며 소년 시절의 기억을 추억했다.

그는 베네치아를 떠나며 아쉬움이 남아있는 감상적인 말을 남겼다.

"나는 베네치아에 짧은 기간밖에 체재(滯在) 하지 않았지만 이곳 생활을 충분히 내 것으로 하였으며 많은 선물을 안고떠난다."

괴테가 떠난 11년 후, 1797년 후퇴 하는 오스트리아 합수부르크 군을 쫓아나폴레옹이 베네치아로 진격해 왔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당시 오스트리아를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의프랑스군은 베네치아의 정복군 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도 산 마르코 광장 앞에 섰을 때는 냉혹한 군인의 마음을내려놓아야 했다.

그는 광장을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살롱"이라며 감탄했다.

니폴레옹은 의외로 바쁜 정무(政務) 중에서도 독서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특히,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슬픔>을 좋아해서 전장(戰場)에서도이 책을 들고 다녔다고 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괴테도 이 당대의 영웅 나폴레옹을 마음속 깊이흠모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808년 10월 2일 이 두 사람은 만났다.

독일을 침공한 나폴레옹은 에르푸르트(Erfurt)에서 괴테를 불렀다.

나폴레옹과의 만남을 괴테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0월 2일 나는 황제의 부름을 받고 접견 실로 들어갔다. 나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황제 앞에 섰다. 황제는 나를 보며 선생이 바로 그분이군요라고 말했다."

이순(耳順)의 60세 대 문호 괴테와 유럽 대륙을 파죽지세로 정복해 가고 있는 40세 불혹(不惑)의 영웅 나폴레옹의 만남이 신선하게 그려진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폴레옹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한 부분을 지적하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은 그것을 왜 그렇게 처리했나요?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데요."라고 말했다.

괴테도 나폴레옹의 이 말에 동의하며"이치에 맞지 않음"을 인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은 부분이 도데체 무엇이냐"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질문과 성화에도 불구하고 괴테는 죽는 날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괴테는 아마 그것이 자신이 존경했던,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사랑했던 나폴레옹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산타루치아 역 근방 민박집에 숙박을 하며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수상 버스를 이용해 찾아 다녔다.

그러나, 베네치아 여행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있다면 "베네치아의 골목"을 아무 생각 없이 걸어보라고 꼭 추천하고 싶다.

산타루치아 역에서 산 마르코 광장까지2번을 걸어서 왕복하며, 나도 기분 좋은피곤함과 상쾌한 고독을 즐겼다.

230여 년 전에 괴테가 그랬듯이 아무에게도 길을 묻지 않으며 다양한 여행객들과 섞여 길을 걷다 보면 산 마르코 광장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해 질 무렵이면 더 좋다.

손에 잡일듯 가까이 보이는 산 조르지오마조레 성당과 붉게 물들어가는 아드리아해는 원색의 수채화를 선사한다.

자유와 고독, 그리고 색채와 노래가 있는 베네치아의 중심, 산 마르코 광장은 지금도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