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正義)란 무엇인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치인들이 중대한 결심을 하거나 출사표(出師表)를 던질 때 즐겨 사용하는 말이 있다.
바로 "정의"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정의의 뜻을 깊이사고(思考) 하고 사용하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정의는 정말 어려운 어휘임이 분명하다.
개인적으로, 고전(古典)에 관심이 있어 가까이 한지가 꽤 많은 시간이 됐지만, 나는 아직까지 정의를 명쾌하게 정의(定義) 한 책은 만나보지 못했다.
인류사를 돌아보면, 정의에 대해 가장 먼저 규명(糾明) 하려고 시도했던 사람은 플라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많은 저서 중 대표작이라고할 수 있는 <국가 Politeia>에서, 플라톤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등장시켜 정의를 해석하려 다양한 시도를 했다.
전 10권으로 되어있는 <국가>는 1권에서 부터 정의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벌어진다.
아테네 남서쪽 항구 도시 페이라이에우스(Peiraieus)에 있는 사업에 성공한 부자 게팔로스의 집에 소크라테스, 게팔로스와 그의 아들 폴레마르코스, 소피스트 트라쉬마코스, 플라톤의 형들인 아데이만토스와 글라우콘 등이 모여 대화를 시작한다.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를 이야기하는 소크라테스에게 "나는 정의가 강자(強者)에게 유익한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오"라며 내뱉듯이 말한다.
정의란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 권력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허울좋은 빈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들린다.
누가 정의로운 사람이며 누가 불의(不義)한 사람인가에 대해서도, 플라톤의 형 글라우콘은 제2권 초반부에 유명한"귀게스 왕 선조의 반지"를 예로 들며 그 판단(判斷)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뤼디아 왕 귀게스 선조의 반지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귀게스 왕 선조는 원래 이전 뤼디아왕가의 왕에게 고용된 양치기였다. 하루는 그가 양 떼를 치던 곳에 큰 비가 오며 지진이 일어나더니 땅이 갈라졌다. 왕의 선조는 갈라진 틈으로 내려가 보니 시신이 한 구 누워 있었다. 그 시신은 금반지를 끼고 있었는데 그는 이 금반지를빼어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가 이 반지를 끼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반지를 끼고 손바닥을 뒤집으면 자신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고, 손바닥을 다시 보석 쪽으로 뒤집으면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마법과 같은 이 반지를 끼고 자신의 주인인 왕의 왕궁에 들어가왕비와 간통을 하게 되며, 결국, 왕비의 도움을 받아 왕을 죽이고 왕권을 빼앗게 된다."
귀게스 선조 반지의 전설은 가벼운옛날이야기 같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의미하는 바가 심상치 않다.
글라우콘은 우리가 신(神)과 같은 이런 "원하는 데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면, 과연 불의를 저지르지 않을 사람이있겠느냐는 의문을 소크라테스에게질문한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는 제1권에서 정의라는 주제를 제시했고, 2권에서 10권까지는 이를 규명하기 위해 다양한 접근을시도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은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국가의 형태는 "통치자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수호자(守護者), 군인으로 볼 수 있는 전사(戰士), 그리고 일반 시민인생산자(生産者)로 이루어진 구성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국가 형태의 틀에 자질을 갖춘사람들로 구성이 된다면 그가 말하는 소위 "이상(理想) 국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데아(Idea)"라는 철학적 용어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는 "아름다운 것 자체 또는 아름다움의 영원불변하는형상(形相)"이라고 하는데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말이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와 "이데아"에 대해서는 기회가 오면 다른 주제를 갖고 다시접근해 보기로 하자.
플라톤은 위에서 언급한 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 제 자리에서 분수를 지키며 열심히 일하는 것이 정의라고 말했다.
플라톤은 이렇게 <국가>에서, 장황한설명과 많은 예를 들어 정의를 설명하려 했으나, 이를 명쾌하게 규명하지 못하고 후반부에 가서 "영혼 불멸설"같은 다소 막연한 이론을 제시하며 끝을 맺는다.
정의는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오히려 좀 더 논리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를 갖고 접근했다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배의 정의에 많은비중을 두었는데, 이는 인간은 무엇보다 "동등한 사람이 동등하지 못한 몫을 할당받거나, 동등하지 못한 사람이 동등한 몫을 받으면 이는 분쟁과 불평의 씨앗이된다"라고 보았다.
하버드 대 교수 마이클 샌덜(Michael Sandel)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는리버럴이즘(Liberalism)의 기초 위에 세워진 서구사회가 공정한 배분을 이루지 못한 허점(虛點)들을 파헤친 책이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였던이 책에서, 샌덜 교수는 아리스토텔레스 의 균등의 정의를 상당 부분 인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래와 같은 주장을 했다.
"한 주제를 놓고 각기 다른 무리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올바르게 행하는 것이 정의라고 여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따라서, "정의는 하나이상이며, 정의와 불의의 경계선도 모호하다"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고대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정의에 대해 해석하려 했지만 아직 완벽한 답을 찾지 못했다.
따라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대한 대답은 "아직 모른다"가 가장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며칠 전, 윤석열 검찰총장이 사직을 하며"상식과 정의가 무너지는 것을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우리 사회는 그가 "정의롭다"라는 사람들과 "불의하다"라는 사람들이 나누어져 시끄럽다.
그가 "정의롭다"라는 사람들은, 그가 살아있는 권력과 용감하게 맞서 싸운 의로운검사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확실히, 윤석열 전 총장은 법을 어겼다고 생각하면 물러서지 않고 맞서는 용감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으로 정치를 할 것 같은 윤석열 전 총장에게는 그를 괴롭히는 세 가지질문이 따라다닐 것이다.
첫째, 그를 발탁한 문재인 대통령과 신의(信義)의 문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와 사람과의 관계를 이렇게 말했다. "정의는 본질적으로 인간적(人間的)인 것이다. 또한 불의한 행위는 자발적이고계획적이며 공격적이다."
둘째, 플라톤의 <국가> 1권에서 게팔로스의 큰 아들 폴레마르코스가 소크라테스에게 던진 아래와 같은 말이다. "소크라테스 선생님, 정의는 친구에게는 이익을 주고 적에게는 해악을 끼칠 수 있는 기술임이 틀림없습니다."
폴레마르코스가 말한 "기술"은 분명히정의보다는 한참 아래 개념인 세속적인"의리'에 지나지 않는다.
셋째,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저서<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언급한 균형에 관한 주장이다. "정의는 일종의 비례다. 즉 정의는 일종의 균등(均等) 함이고 중용(中庸)이라고할 수 있다"
윤석열 전 총장이 관직에 있을 때 업무를 조직이나 사적인 이익을 절제하며균형감 있게 처리했느냐는 질문이다.
비록, 아직 학문적으로 정의가 무엇인지규명되지 못했다고 하지만, 우리는 모두가 마음 한구석에 자신만의 정의에 대한표상(表象)을 갖고 있다.
한 주제에 대해 정의와 불의로 대립된에너지가 어떻게 표출되어 결론을 유도하느냐는 것은, 우리 사회가 정의를 바라보는 바로미터(Barometer)라고 할 수 있다.
공직을 떠나 정치의 길로 들어선 윤석열 전 총장의 앞길이 어떻게 될지 그래서 더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