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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당신은 누구십니까

피렌체는 이탈리아 관광지 가운데 여행객들이 가장 사랑하는 도시 중 한 곳이다.

피렌체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속에 가보고 싶은 특별한 대상이 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을, 보티첼리의비너스의 탄생을, 또, 어떤 사람은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두오모를 보기 위해 발길을서두른다.

그들 중에는 <신곡(神曲)>을 쓴 단테의발자취를 찾아보려는 사람들도 있다.

대성당 앞 시뇨리아 광장에서 우피치미술관 쪽으로 이어진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단테의 생가(生家)가 보인다.

집 앞에서 그냥 돌아가는 여행객들도 많이 있지만, 적어도 <신곡>을 읽었던 사람들은 집안을 둘러보지 않고 발길을 돌릴 수 없다.

그러나, 생가의 내부를 돌아본 여행자들은 대부분 실망을 하게 된다.

집안에는 단테의 작품 원고나 필사본 같은 종이 한 장 남아있지 않아 왠지 모르게 초라하다.

밖에 나와 그가 걸었던 골목길과, 평생의 연인 베아트리체를 만났다는 베키오 다리 위를 걸어보지만 무심한 관광객들만 북적인다.

하긴, 아직 단테의 유골도 라벤나에서찾아오지 못해 산타 크로체 성당에 빈무덤만 덩그러니 있는 피렌체에서 단테의 흔적을 찾아보려는 것은 무리다.

단테 알리기에리(Durante degli Aligh- ieri)는 1265년 5월에 피렌체의 몰락한한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단테는 그 명성과 달리 개인적인 신상에 대한 역사적 기록들이 거의 없다.

오늘날 단테에 대한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데카메론>의 작가로 잘 알려진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 io)의 작품 <단테의 일생 Vita di Dante >에서 얻은 자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보카치오는 단테가 48세 때, 단테가 피렌체에서 추방당한지 13년째되던 해에 태어났으니, 그도 <단테의 일생>을 사료(史料)보다는 떠도는 소문에 기반을 두고 썼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단테의 인생은 베아트리체와 정치(政治) 를 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단테는 아홉 살 때, 피렌체의 유력한 귀족 포르티나리(Folco Portinari)의 집에서 열린 잔치에 아버지를 따라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포르티나리의 딸 비체(Bice)를 만나게 된다. (단테는 평생 동안 그녀를 베아트리체라 불렀다.)

단테는 어린 소년이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은 사는 동안 절대로 떠나지 않는 열정으로 남게 되었다.

첫 만남으로부터 9년이 흐른 단테가18살이 되던 해, 우연히 이 둘은 거리에서 만나게 된다.

단테와 베아트리체는 아는 듯 모르는 듯 가벼운 인사를 나누며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베아트리체는 24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보카치오는 <단테의 일생>에서 그때 단테의 절망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아름다운 베아트리체가 24살이 끝날 무렵 천국에 준비된 그 영광을 향해 떠났다. 그녀의 떠남으로 단테에게는낮이 밤과 같고 밤이 낮과 같았다. 한순간도 울음과 눈물과 한숨 없이 지나지 않았다."

단테가 정치 활동에 몰두하게 된 것은 어쩌면 베아트리체에 대한 그리움을잊기 위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피렌체는, 중산층을 옹호하는 구엘프 당과 상류층을 대변하는 기벨린당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당파 싸움은 단테가 속한 구엘프 당이승리하게 되고, 37살의 단테는 피렌체 정치의 최고 직(職)이라고 할 수 있는6인 행정 위원회 프리오리(Priori)까지오르게 된다.

그러나, 구엘프 당은 다시 교황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피렌체의 독립을 지키 자는 비앙키(Bianchi) 파와 교황을 지지하는 네리(Neri) 파로 갈라져 정치적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비앙키 파에 속해있던 단테가 사절단으로 로마를 다녀오던 중, 시에나에 이르렀을 때 네리 파가 비앙키 파를 축출하는정변이 일어난다.

단테는 부패와 공금 유용 혐의로 기소 되었지만 법정에 서기를 거부하며 피렌체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때부터 단테는 파도바, 루카, 볼로냐, 파리, 라벤나 등을 떠도는 고달픈 유랑(流浪)의 세월이 시작된다.

귀향을 늘 꿈꾸며 살았지만 단테는 끝내피렌체로 돌아가지 못하고 라벤나에서1321년 9월 14일 20여 년의 긴 순례자의 삶을 마치며 숨을 거둔다.

단테가 마지막으로 머문 라벤나의 군주구이도 노벨로((Guido Novello)는 단테에게 영예로운 환대와 위로를 베풀었다.

이런 연유로 단테의 유해는 지금도 라벤나에 있다.

보카치오는 단테의 추방령을 풀어주지 않았던 피렌체 시민을 이렇게 성토했다.

"오, 감사할 줄 모르는 나라여, 너희의 가장 훌륭한 시민이며, 뛰어난 은혜자이며, 너희에게 둘도 없는 시인을, 유례 없는 무자비함으로 몰아낸 너희의 그광기와 그 무지는 무엇이었더냐?"

또, 단테의 친구이며 볼로냐의 시인이였던 조바니 델 바르질리오는 그의 죽음을슬퍼하며 이렇게 노래했다.

"은혜를 모르는 피렌체여, 너는 자신의 아들에게 그렇게 무정하여, 그를 추방으로 내몰고, 결코 돌아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가 머물렀기에 찬란한 라벤나는 행복 하다. 그 도시의 영예로운 군주의 방패 아래."

후에, 피렌체는 최고의 시인이라 불리던 단테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서 교황의힘까지 빌려 엄청난 노력을 했으나 라벤 나는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며 거절했다.

"너희는 단테를 싫다고 쫓아냈던 것 아닌가? 단테는 실로 라벤나의 시인이다."

역설적인 이야기이지만, 죽음과 같았던 단테의 이 망명(亡命)의 세월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의 불멸의 작품 <신곡>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지난(至難)한 고통의 시간 속에서<신곡>이 잉태되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신곡>의 원제목은 희극, 라 코미디아 (La Commedia) 였다.

단테는 친구 칸그란데 델라 스칼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슬픈 시작에서 행복한결말에 이르기 때문에" 코미디아라고제목을 붙였다고 말했다.

오늘날에는 <신곡>을 라 디비나 코미디아(La Divina Commedia)라고 부른다.

중간에 들어간 형용사 "신(神)적인"이라는 뜻이 있는 디비나(Divina)는 보카치오가붙인 어휘다.

신곡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단테를 지옥과 연옥으로 안내해 준 <아이네이스>의 저자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천국을 안내해 준 베아트리체다.

중세의 철학서라고도 불리는 <신곡>은, 많은 사람들이 구입하지만 너무 어려워 끝까지 읽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곡>의 주제는 "베아트리체를 찾아 지옥과 연옥을 거쳐 천국에 이르는여정"이라고 짧게 말할 수 있다.

이런 단테의 베아트리체에 대한 지극한사랑은 <신곡> 전체를 압축해놓은 듯한천국 편 31곡에 있는 송시(頌詩)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오, 여인이여. 그대 안에 내 희망이 힘을 얻고 그대 나의 구원을 위해 저 지옥 속에발자취를 남기시는 괴로움을 겪으셨습니다.

내 보아왔던 그 많고도 많은 것들을 그대의 힘이며 그대의 선에서 온은혜와 덕으로 나 이제 받아들입니다.

그 모든 길과 그 모든 방법으로써 나를 속박에서 자유에로 이끄신 그대, 모든 것을 이루시는 힘을 지니셨습니다.

그대의 너그러움을 내 안에 간직하시어그대가 건강히 치유해 준 나의 영혼이 그대의 뜻을 따라 육체에서 풀려나게하소서."

<신곡>은 신정(神政)의 시대였던 당시에 어느 문학 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 명작이다.

왜냐하면, 중세의 시대에는 신(神) 외에는 누구도 이런 지고(至高)한 사랑의 대상(對象)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여인에 대한 단테의 이 아름다운 서사시(敍事詩)는 오직 신만이 찬양받아야 했던 어둠의 시대에 파란을 일으키며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렇게, <신곡>은 "다시 인간(人間)으로돌아가자"라는 위대한 르네상스(Renai- ssance)의 시작을 알리는 한줄기 빛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