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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5자·4분 남짓

백석과 자작나무숲

성북동 길상사는 우리 집에서 걸어 20분거리에 있다.

지금 사는 집에서 33년을 살았으니, 당연히, 대원각이 길상사로 바뀐 1997년이전에도 나는 성북동 골목길을 가끔 걸었다.

다만, 지금처럼 유명한 데스틴에이션(Destination)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곳을 무심하게 스치듯 지나치곤 했다.

다행인 것은, 80년대 말쯤 우연히 사회선배 한 분과 대원각에서 점심 식사를 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이미 요정(料亭)의 시대가 지난후라, 대원각은 넓은 정원이 있는 고급음식점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본체와 떨어진 별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지금 길상사에 가보면 그때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어 조금 서운한 생각도 든다.

그러나, 단 한 번 들렀을 뿐이지만 그나마 김영한이 운영하던 대원각에 대한 희미한추억 한편을 마음에 담아두었으니 다행이다.

백석과 김영한의 로맨스는 이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난 세대의 따뜻한러브 스토리가 되었다.

그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김영한이 자신의 재주를 알아보고 많은 도움을 주었던신윤국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자, 그를 면회하러 함흥에 갔을 때였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교편을 잡고 있던 백석이 학교 회식자리에서 옆자리에앉았던 김영한을 만나게 된 것이다.

두 청춘은 첫눈에 반했고, 얼마 되지 않아동거를 하게 된다.

김영한의 아호인 "자야(子夜 )"는 이때 백석이 주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은 백석의 집안에서 김영한이 기생이라는 이유로 크게 반대 를 해 벽에 부딪치게 되고, 이런 복잡한 상황을 벗어나려 백석은 만주로 떠나고 김영한은 서울로 내려오게 된다.

그 후 6.25전쟁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서울에 온 김영한은 요정을 경영하여큰 재산을 모으게 되고, 백석은 북한에서 계속 교편을 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한이 1997년 법정 스님에게 당시 시가 천억 원에 달하는 대원각을 시주하며, "천억 재산이 어찌 백석의 시 한 줄과비할 수 있으랴"라고 기자들에게 했던 말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백석의 시 중에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나린다"로시작하는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이다.

김영한은 평소 이 시 속의 "나타샤"는자신이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선이 굵고 통이 큰 김영한은 돈 있고 권력 있다고 그저 그런 평범한 남자를 좋아했을여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외모가 훤칠하고, 시를 쓰며, 아오야마 대학 영어과를 나온 모던보이(Modern Boy) 백석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평생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할 운명 같은 남자가 되었다.

법정 스님이 김영한에게 준 법명 "길상화보살"에서 길상사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하지만, 백석이 1933년 청산학원에 다닐때 그의 일본 주소지가 동경의 "길상사1875 번지"였던 것을 보면 길상사라는이름에서도 분명히 백석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런데, 나타샤가 김영한이 아닐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통영의 란(蘭)이라는 여인 때문이다.

1935년 백석이 24살 때 친구 허준의결혼식 피로연에서 이화여고 학생이던 란을 보고 깊은 사랑에 빠졌던 것은 여러정황상 사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백석은 1936년 란을 찾아 통영에 간적이 있으며, 란에 대한 그의 애틋한 마음 처럼 들리는 <통영 1>, <통영 2> 그리고<통영-남행시초 2>라는 세 편의 시를남겼다.

1935년부터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 를 발표한 1938년까지 4년 동안 백석이김영한과 란을 만나고 헤어졌던 일들이겹치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나타샤가 누구일까?"라는 물음은 부질없는 이야기다.

나타샤가 김영한이든 란이든 아니면 백석이 마음속에 그리던 이상 속의 여인이든 그것은 오로지 백석과 그들의 몫이다.

우리에게는 백석의 아름다운 시만 곁에 있으면 된다.

북방의 사투리들로 수놓은 백석의 시는동시대의 어느 시인의 시보다 서정적이며, 중후하고 단단하고 멋있다.

1930/40년대 백석의 시는 당시 문학과예술계 그리고 대중문화 분야에 상상 이상의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2011년 초에 화가(畫家) 김영진 씨가<백석평전>이라는 책을 발표했었다.

화가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이 시인의 평전(評傳)을 썼다는 신문 보도를 보고 의아하게 생각해 바로 구입해서 읽었던 일이 있다.

김영진 씨는 일제 강점기에 활동하던노천명, 윤동주, 신경림, 이중섭, 박수근 같은 당대의 시인 화가들도 백석에게서 작품의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에는, 자신의 아버지 김정대 씨가 당시 대중음악계에서일하며 경험했던, 예술계의 사람들이 백석의 시에서 영향을 받은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고 했다.

한 예로, <백석 평전>에서 김영진 씨는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도 백석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참으로 흥미롭다.

그의 아버지 김정대 씨는 <동백 아가씨> 작곡가 백영호 씨 그리고 작사가 한산도씨와 친한 사이로 자주 어울려 술자리를 같이 했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백석의 시와 <동백 아가씨>는 아래와 같은 닮은 뉘앙스가 분명히 있다.

<동백 아가씨> 한산도 작사백영호 작곡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오

<통영 2> -백석-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 붉게 동백꽃 피는 계절엔 타관 시집을갈 것만 같은데____ ____

백석은 자작나무를 무척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 <북방에서>에는 "나는 그때/자작나무와 익갈나무의 슬퍼하든것을기억한다"라는 구절이 있으며, 자작나무를 아예 시의 제목으로 한 아래 작품도 있다.

<자작나무> -백석-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자작나무다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자작나무다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은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자작나무다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____ ____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 자작나무숲은 내가 아껴놓은 여행지 중 하나였다.

오래전에 백석의 시를 통해서 만났던자작나무숲을 머릿속에 그리며 지난 9월 8일 그곳을 향해 떠났다.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굽이굽이 휘어진 인제의 산길을 한참 달려원대리에 도착했다.

널따란 주차장은 강원도의 어느 산골과별반 다름없는 고갯길에 있다.

자작나무숲을 만나기 위해, 초입에서1시간 정도 걸어가는 길도 늦여름 9월의꽃들이 뿜어내는 향기로 상쾌하다.

한두 그루씩 그리고 한무리씩 드문드문보이던 자작나무들은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시 속의 표현처럼 "온통 자작나무"였다.

나뭇잎 사이사이로 손짓하는 코발트색(Cobalt) 하늘과 아직 푸르름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풀밭이 어우러진 자작나무숲은경이롭기까지 하다.

"아- 나무들의 숲이 이렇게 찬란한 아름다움도 연출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비록, 백석이 노래했던 함경도 여우가우는 산골의 광대한 자작나무숲은 아닐지라도 그의 시상(詩想)을 느껴보기에 모자라지 않는 풍경이다.

갑자기 백석이 노래했던 함경도 땅의 "온통 자작나무"숲을 찾아갈 수 없다는서글픔에 가슴이 먹먹해 온다.

다시, 우리는 가을의 문턱에 있다.

팬데믹으로 한적한 이때가 어쩌면 자작 나무 숲길을 백석의 시를 외우며 걸어볼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니, 꼭 한 번 찾아가보기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