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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9자·4분 남짓

내 마음속의 음식

소울 푸드(Soul Food)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서아프리카의 먹거리들이15세기 이후 노예들과 함께 미국에 들어와 주로 남부 흑인들의 음식으로 자리잡으며 생긴 어휘다.

우리는, 가끔, 단어 하나에 길고 긴 역사와 사연들이 담겨있는 말을 만날 때가 있다.

소울 푸드라는 말속에도 간단하게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흑인들은고달픈 노예의 삶을 살면서 고향 냄새가 나는 음식 앞에 두고 온 가족과 마을의전경을 떠올리며 울었을 것이다.

영혼이 담긴 음식, 소울 푸드라는 단어는 이제 미국 남부 흑인 음식의 의미를 뛰어넘어 한 민족과 지역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는 잊지 못하는 먹거리를 상징하는 보통 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소울 푸드는 민족과 나라와 같은 집합적인 의미 위에서 해석하기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어휘라고 봐야 한다.

사람의 감각은 정말 신기할 정도로예민하다.

그중에서도 후각(嗅覺)은 가끔 우리 자신을 깜짝 놀라게 할 때가 있다.

50/60 년 전, 까마득한 옛날에 먹었던 음식의 맛을 기억해 내며 잊고 있던 느낌을 되살려내니 말이다.

그것은 맛을 보는 혀 때문이 아니라, 향기(香氣)를 찾아내는 놀랍고 신기한후각 때문이다.

음식점이나 잔칫집에서 무심코 먹던김치에서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해주던나만의 기억 속 향을 찾아내며 아득한추억을 불러내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렇게, 늘 접하는 김치지만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향을 내 후각이 찾아내는 것은 김치가 갖고 있는 풍미가 수도 없이 많고 다양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된장/김치 찌개가 한국인들의 소울 푸드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우리가 먹고자랐던 찌개의 맛도 집집마다 어머니의솜씨와 재료에 따라 가지각색이었다.

짭짤한 강된장으로 찌개를 끓였던 집, 굵은 멸치를 통째로 넣고 끓였던 집, 조갯살을 즐겨 사용하던 집... 그 손길과재료와 양념에 따라 풍미가 다 달랐다.

그래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영혼의 음식은 개인마다 다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세대는, 비록 가난한 어린 시절을보냈지만, 다양한 소울 푸드를 갖고있다.

얼음이 송송 떠있는 동치미 국물에서, 단물이 흘러내리는 솥에서 막 꺼낸 뜨거운 고구마에서, 노릇노릇하게 구운갈치 토막에서, 또, 시장에 쌓여있는홍시를 보고 한 겨울 광안의 쌀 독에넣었다 꺼내 먹던 홍시를 생각하며 사람들은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

지금이야 먹을 것 걱정하는 사람들이드물지만, 50/60년 전만 해도 하루 세끼 쌀밥 먹는 집은 극히 드물었다.

쌀밥이 그랬는데, 기름진 고기는 더말해서 뭐 하겠는가?

어쩌다 닭 한 마리 잡게 되면, 국을 끓여 고기 살을 몇 점씩 넣어 온 식구가 두어끼를 행복하게 보냈었다.

그런데, 어려운 그 시절에도 간간히먹을 것이 풍성한 때가 있었다.

명절과 제삿날이다.

명절과 제사의 음식은 예(禮)를 올리고 사람들이 먹었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신들에게 드리는 음식이었다.

그 때문에 명절과 제사 음식은 더 세심 하게 차렸고, 풍성했으며 다채롭고 호화로웠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그 때 부엌에서 이런 음식들을 고생하며 정성스럽게준비했던 분들에게 고마움의 표시가 많이 부족했다는 아픈 미안함이다.

세상이 변하며, 이제, 음식을 만드는사람들에 대한 인식도 크게 바뀌었다.

특히, 전문적인 요리사를 요즘에는쉐프(Chef)라고 부르는데, 주로 주방장을 지칭하는 이 말은 상당한 권위도 있다.

이름이 알려진 실력 있는 요리사는아티스트(Artist) 대우를 받는다.

음식을 예술에 비교하는 것은 지나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미술과 음악보다 훨씬 더 감각적이며직접적인 즐거움을 주는 훌륭한 요리사를 아티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한류가 확장되며 우리 음식이 세계인들의 입맛을 사로 잡고 있다는 보도가 눈에 띈다.

불과 2/30년 전만 해도 "김치냄새"가한국인들을 폄하하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옆 나라 중국과 일본이 서로 김치는 자기 나라가 원조라는 희한한 억지를부리는 것을 보며 "세상이 이렇게 변하기도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뉴욕과 LA를 비롯한 미국의 주요 도시 한국 음식점들은 이제 많은 외국인들이몰려오며 현지화에 성공해 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런던에는 몇 년 전만 해도 찿아보기 힘들던 한국 식당이 100여 곳이 넘게 들어섰다고 한다.

판매되고 있는 음식들은 불고기, 비빔밥, 삼겹살, 된장/김치찌개, 보쌈, 라면, 김치햄버거, 코리안 핫도그 등등 그 종류도다양하다.

그동안 특징 없고 평범한 음식으로만여겨졌던 우리 음식이 적당히 자극적이며 감칠맛 나는 풍미로 세계인들의 팰럿(Palate), 미각을 자극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한국의 음식 문화는 분명히 매력이 있다.

음식은 맛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어떤 곳에서 먹느냐는 것도 큰 몫을 한다.

비교적 조용히 식사를 하는 서구사회와 달리,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며 시끌벅적한 가운데 먹고 마시는 우리 식문화는 귀중한 유산이다.

친구들을 만나 조용한 음식점을 찾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먹자골목으로 발길이 가는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한다.

어쨌든, 우리 음식 문화의 이런 앰비언스(Ambiance), 독특한 분위기는 강력한경쟁력이라고 볼 수 있다.

한 나라의 문화 확장에서 음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

"영국이 인도를 정복했지만, 영국인들은 인도 음식에 정복당했다"라는 말이 있다.

영국인들이 인도를 식민 지배하는 동안카레를 비롯한 인도의 다양한 음식 문화에 동화되어 지금도 이런 음식들을 주식 처럼 먹고있는 상황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이처럼, 다른 어떤 문화보다 음식이 다른문화권에 뿌리를 내리게 되면 그 생명력은 길고 파급력이 크다.

지난해 9월 옥스퍼드 사전에 새롭게등재된 한국어 26개 단어 중 아래와 같이 음식 관련 어휘가 9개나 차지하고 있는 것은, 세계인들의 우리 음식에 대한 관심이 어떤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반찬(banchan)/ 불고기(bulgogi)/치맥(chimaek)/ 동치미(dongchimi)/갈비(galbi)/ 잡채(japchae)/ 김밥(kimbap)/ 먹방(mukbang)/ 삼겹살(samgyeopsal)"

세대와 세대를 이어오며 애환을 함께 했던 한국의 아름다운 음식들이, 이제, 천년의 침묵을 깨고 세계를 향해 비상의날갯짓을 하고 있다.

설날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다시 정갈하고 맛있고 따뜻한 음식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명절이 되면 의례 차려지는 음식이라고 생각했던 관념에서 벗어나, 이번 설에는선조들의 지혜와 정성이 면면히 흘러오며 꽃 피운 우리의 위대한 음식에 경의를 표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