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神話) 속의 식량(食糧) 전쟁
바티칸 박물관 서명실에는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과 함께 <파르나소스>라는 프레스코화가 있다.
벽화에는 고대로부터 중세까지 서양사에서 찬란한 업적을 남긴 예술가들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들 중 가장 높은 곳에서 왕관을 쓰고 마치 신(神)처럼 서 있는사람이 보인다.
그의 곁에는 <신곡>을 쓴 단테와<아이네이스>를 집필한 로마의 시인베르길리우스 그리고 <데카메론>의저자 보카치오가 신하와 같은 모습으로 서 있다.
인류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추앙받고 있는 호메로스다.
그 호메로스가 2700여 년 전에 완성한,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고전 중의 고전이며 불멸의 명작으로 별처럼 빛나는 인류의 자산이 된지 오래다.
대(大) 서사시(敍事詩), <일리아스> 는 10년을 싸운 트로이 전쟁의 마지막열흘 정도의 날들을 노래한 작품이며, <오뒷세이아>는 주인공 오뒷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고향 이타카로돌아가며 겪었던 모험 이야기다.
그러니까, 두 작품은 모두 트로이 전쟁 이라는 시대적 사건의 배경에서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트로이 전쟁을 일으키게 했던 황금사과 만큼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준 신화도 찾아보기 힘들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인간 펠레우스의 결혼식에 초청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에리스가, 결혼식장에 던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가질 수 있다"라는 사과는 순식간에 올림피아의 주 여신 인 헤라와 아테나 그리고 아프로디테의눈빛을 질투로 반짝이게 했다.
누구 편도 들 수 없던 신들의 왕 제우스는 이다산의 목동으로 있던 트로이의 왕자 페리스에게 심판을 맡긴다.
언제나 벗은 몸으로 나타나는 아프로디테는 그렇다 치고, 가정과 결혼의 여신이며 신들의 왕비라고 할 수 있는 헤라 뿐만 아니라 지혜와 정의의 여신 아테나마저 누가 더 아름답냐는 싸움에서 주저 없이 옷을 벗었다.
파리스는 불꽃 튀는 신들의 미인대회, 이 패전트(Pageant)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주겠다"라고 약속한 아프로디테에게 사과를 건네 준다.
불행하게도, 당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이미 결혼을 한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나였다.
그러나, 약속은 약속이다.
여신은 약속을 지켜야 했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도움을 받아 스파르타 왕궁을 찾아가헬레나를 트로이 성으로 데려오는데성공한다.
신화는 파리스가 헬레나를 강제로 납치해갔다는 키드넵핑(kidnapping) 설과, 눈이 맞아 함께 도망쳤다는 일로핑(Elo- ping) 설로 지금도 나누어져 있다.
졸지에 아내를 빼앗기고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있던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는형(兄)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을 찾아가하소연을 한다.
결국,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총사령관 아가멤논을 필두로 아킬레우스, 오뒷세우스, 아이아스와 같은 전사들이 참여한 연합군을 구성하여 트로이 정복을 위해 떠나게 된다.
트로이 전쟁은 인간의 전쟁이었지만 신들의 전쟁이기도 했다.
제우스 신을 제외한 올림포스의 모든신들은 그리스와 트로이 편으로 나뉘어, 싸움에 끼어들며 자기 편의 전사들을독려하고 도왔다.
특히, 일리아스의 내용 중에는 아프로디테에게 최고의 미녀 자리를 빼앗긴 여신 헤라와 아테나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트로이 성 파괴를 위하여 온 힘을다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신화를 바탕으로 트로이 전쟁을 바라보면, 이 전쟁은 여신들의 질투에인간들이 말려든 명분도 실익도 없는 쓸데없는 싸움판이었다.
당연히, 역사학자들은 트로이 전쟁을신화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해석하고 있다.
그리스를 여행한 사람들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이 나라는 국토의대분이 척박한 산악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문명의 발상 지역인 남부는 북부 지역에 비해 산지 비율이 더 높아, 고대시대부터 도시국가들은 식량 확보를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야 했다.
그들은 흑해 연안에 식민 국가들을 두고, 이곳에서 식량의 대부분을 들여 왔다.
지금 유럽은 물론 많은 아프리카와중동 국가들이 흑해의 곡창에서 식량의 상당 부분을 공급받고 있듯이, 고대그리스인들도 그들의 식량을 이 지역에의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트로이는 흑해로 가는 관문인헬레스폰토스 해협 입구에 자리 잡고 있던 강력한 해상 국가였다.
트로이는, 당연히, 도시국가들에게통행세를 요구했을 것이다.
다른 문제도 아니고, 생명줄과 같은 식량 운송로를 틀어쥐고 압박하는트로이를 도시국가들은 가만히 두고만볼 수가 없었다.
이해를 함께하는 그리스의 폴리스 국가들은, 결국, 연합군을 결성하여 트로이 정벌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를신화가 아닌 식량과 지정학적 세력 다툼으로 바라본 역사학자들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최근, 유엔 식량 기구(UN food age- ncies)와 UNICEF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세계 식량 위기가올여름을 지나며 재앙 수준으로 갈 수 있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우크라이나는 2020년과 2021년에4470만 톤의 곡물을 수출한 농업 대국이다.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의 흑해 해상항로 봉쇄로 우크라이나는 6월 현재 약2200만 톤의 수출 곡물이 묶여 있다고 한다.
러시아의 이번 전쟁 전략은, 우선, 우크라이나 동남부 지역인 돈바스 지역과 마리우폴(Mariupo)을 점령하여 러시아 본토와 크림반도를 육상으로연결한 후, 최종적으로 오데사(Odesa) 를 손에 넣어 흑해의 해상권을 완전히장악하는 것이었다.
유럽의 에너지 패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한 러시아는, 흑해의 항로를 독점 하여 세계 곡물 시장까지 자신들의통제권에 두겠다는 속셈이었다.
오데사는 우크라이나 문화와 관광의중심지다.
시내에는 르네상스식 건물이 늘어서 있고, 해안을 따라 고급 리조트와 호텔이 줄비한 동 유럽 최고의 휴양지다.
유럽인들은 이 아름다운 항구를 "흑해의 진주"라고 부른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데사는 흑해 연안 어느 해안 도시보다 수심이 깊은 천혜의 항구다.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은 95퍼센트 이상 이 항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전쟁 초기부터 상당수의 세계적인 정치 평론가들은 오데사를 전쟁의 승부처로 보고 있었다.
그들은 절대 권력자 푸틴이 흑해의진주, 오데사를 얼마나 갖고 싶어 하는지를 이미 알고있었다.
지금 오데사는 우크라이나가 통제하고 있지만, 러시아의 흑해 함대가 봉쇄하고 있어 항구로서 역할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3300여 년 전 그리스 연합군이 빵을 위해 트로이 원정을 떠날 수밖에 없었 듯이, 네이토(NATO)와 서방 측은 세계 식량위기 극복과 우크라이나 경제회생을 위해 러시아의 오데사 봉쇄를타파해야 하는 난제(難題)에 직면해 있다.
프로메테우스의 신화, 이아손의 아르고원정대 이야기 그리고 여전사 아마조네스의 전설이 숨 쉬고 있는 풍요의 바다, 그 흑해에서 부질없는 인간들의 전쟁이 속히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기를 기원 한다.
김종호
•라파엘로 산치오의 <파르나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