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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비세스(Cambyses)가 인류에게 남긴 교훈(敎訓)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들렸을 때, 마주치는 수많은 그림들에 대한 배경 지식을 다 알기는 불가능하다.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전문적인 큐레이터가 아닌 바에는예술품 하나하나의 시시콜콜한 이야기 까지 알아서 뭐 하겠는가.

그런데, 가끔, 전시관를 걷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작품들이 있다.

내가 아는 이야기나 역사적인 사건을 표현한 작품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네덜란드 화가 헤라르트 다비트(Ger- ard David :1460-1523)의 <캄비세스 왕의 재판>도 누군가에게는 그런 작품 일 것이다.

캄비세스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중 한 명이다.

<역사>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페르시아 이야기"라고 불려도 좋을 만큼 이 제국의 건국과 주변 국가들에 관한기록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페르시아 제국의 건국과, 혼란 그리고 이를 수습하며 대 제국으로 가는 기반을확고히 다진 과정은 아래 3명의 인물을 살펴보면 된다.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캄비세스(Cambyses), 다리우스(Darius)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기원전 550년 경 서아시아는소아시아의 리디아, 티그리스 동쪽의 메디아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유역의갈데아(신 바빌로니아)가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이 세 나라를 차례로 무너뜨리며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사람이 키루스이다.

우리말 성경에 "고레스"라고 기록되어 있고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목자"라고불렀던 그는, 존중과 관용 정책을 펴 페르시아 국민은 물론 정복지 백성들에게까지 존경을 받았다.

그는, 무엇보다, 포로 석방을 중요한정책으로 선정해 시행했다.

바빌론에 노예로 끌려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키루스의 관용 정책덕분이었다.

현재 대영 박물관에 소장된 키루스의비문에도 그의 뜻이 이렇게 분명히 기록되어있다.

"나는 모든 포로를 그들의 고향으로돌려보낼 것이다"

<역사>에는, 키루스는 아들 캄비세스가 어린 시절, 이미, 그를 후계자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529년, 키루스 대왕이 마사게타이 족과의 전투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후, 왕위에 오른 캄비세스는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정복 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했다.

그는 중앙아시아 초원을 정벌했으며, 옥수스(아무다리야 강의 옛 이름) 유역을 장악한 후 인더스 강 서쪽 해안까지 거침없이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캄비세스의 최대 업적은, 아버지 키루스가 미완으로 남겨놓았던, 이집트 정복을 이룬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집트를 정복한 후, 이에 만족 하지 않고, 다시 눈을 들어 카르타고와리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522년 3월 본국인페르시아에서 신관(神官) 가우마타(Ga- umata)가 주도한 반란이 일어난다.

캄비세스는 급히 말머리를 돌려 귀국길에 올랐다.

하늘이 그를 버린 것일까, 아니면, 운이다한 것일까.

귀국길에 있던 어느 날, 캄비세스의허리에 차고 있던 칼집의 끈이 풀려 떨어지며 안에 있던 칼이 그의 발등을찍는 사고가 일어났다.

상처는 무더운 날씨에 덧나 살이 썩어들어가며, 결국, 캄비세스는 한 달을넘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캄비세스가 죽자 광활한 페르시아 제국은 너도나도 왕을 자처하며 산산조각이날 형편이 되었다.

이때, 캄비세스의 수하 장군 중에 왕실아카메네스 가문의 한 사람인, 다리우스 라는 자가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며반란군을 진압하기 시작한다.

그가 바로 페르시아 최고의 현군이라 불리는 다리우스 1세다.

난세에 혜성처럼 등장한 그는 캄비세스의 죽음은 자신에게 신이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다리우스는 우선 반란의 중심 인물이었던 가우마타를 제압하고 그를 지체 없이처단하였다.

그는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욕망과 두려움을 누구보다 잘꿰뚫고있었으며, 또, 이를 최대한으로이용한 인물이다.

예를 들어, 바빌론 성이 투항하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끝까지 저항하자, 다리우스는 성이 함락된 후 포로 3천 명을 한꺼번에 처단하며 여타 반란군들을 공포에떨게 만들었다.

그러나, 무자비하게 진압한 반란군점령지에 3년 동안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주며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다리우스가 심혈을 기울여 조직한"만인불사부대"는 파죽지세로 반란군을제압해 나갔다.

저항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가혹한형벌이 내려지는 상황에서, 대부분의반란군들은 다리우스에게 백기 투항 했다.

다리우스는, 이렇게, 불과 1년 만에 모든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페르시아가 대 제국으로 가는 길을 굳혔다.

다시, 그림 <캄비세스 왕의 재판>의 주인공, 제국의 창업자 키루스의 아들캄비세스에 대해 더 깊이 알아보자.

캄비세스는 사려 깊은 아버지 키루스와는 전혀 딴판의 인물이었다.

어릴 적부터 간질을 앓아왔던 그는 성격이 포악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여긴 친동생을 죽였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인인 왕비가 이를 부당한 처사라며 말리자 그녀를가차 없이 죽였다.

캄비세스가 이집트 정복길에 있을 때, 신관 가우마타가 반란을 일으키자 많은 지역 맹주들이 동조했던 것도 그의폭정 때문이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25장에는, 캄비세스 제위 시절에 있었던 한 왕실재판관(오늘날의 대법관)의 독직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오타네스의 아버지 시삼네스(Sisam- nes)는 왕실의 판관이었는데 뇌물을 받고 부정한 판결을 내린 적이 있었다. 캄비세스는 그의 멱을 따고 가죽을 모두벗기게 했다. 그리고 벗겨낸 가죽으로가죽끈을 만들게 하여, 시삼네스가 판결할 때 앉았던 의자를 이 가죽끈으로엮게 했다. 그런 다음 캄비세스는 자기가 죽여 가죽을 벗긴 시삼네스 대신 시삼네스 아들을 판관으로 임명한 다음, 그가 어떤 자리에 앉아 판결을 하고 있는지 명심하라고 경고했다."

<역사>에는 아버지 가죽 의자에 앉아 판결을 해야 했던 아들 오타네스의 심정을 기록한 내용은 없다.

다만, 우리는 그가, 떨리는 마음으로 의자에 앉아, 재판 하나하나에 일체의사심을 버리고 공정하게 판결하려 온 힘을 다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오타네스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기며 이야기를 마무리 한다.

"이 의자에 앉아 재판을 해야 했던 오타네스는 후에 장군이 되어 뷔잔틴, 칼케톤, 트로아스 지방을 함락하는 공을 세웠다."

언뜻 보면 재판관 시삼네스 독직 사건은 페르시아의 캄비세스라는 폭군의 시대에 일어났던 여러 끔찍한 일들의 하나라고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 있었던 이 사건은 서구 사회가 문명화되면서 "법관이란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정의(定義) 하는데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그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구미 선진국에서 똑똑하고 머리 좋은 젊은이들이우리처럼 죽기 살기로 판사나 검사가되려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어쩌면, 인간이 인간을 구속하고 심판 하는 검사나 판사라는 직업은 오타네스가 앉았던 의자처럼 무섭고 고독한자리인지 모른다.

언젠가부터 대한민국은 문화 강국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으며, 또, 많은 나라들이 이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전관예우"라는 어처구니없는 비리가 버젓이 횡행하는 현실은 우리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타인의 재산을 압류하고 인신을 구속 하는 영장을 마치 자신들의 특권인 양남발하며, 지나가는 소가 웃을듯한 판결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리는 사법부를바라보면 절망감마저 든다.

문득, 정치 칼럼에 가끔 등장하는 이런 말이 떠오른다.

"A zombie is disappearing, but a monster is in the process of being born. 좀비가 사라지는가 했더니, 괴물이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