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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대장 벳소스(Bessos) 의 최후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고, 지금은 터키 땅이 된 그라니코스강 평원 앞에 섰을 때 가슴 뜨거웠던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붉은색 야생 양귀비꽃들은 2300여 년 전 이곳에서 있었던 인류사를 바꾼 치열한 전투를 아는지 모르는지 바람결에흔들리고 있었다.

인적 없는 들판에는 녹색 잎이 무성한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서있다.

빠르게 흘러가는 초여름 하늘 구름 사이로 은빛 햇살이 비치고, 지평선 너머에서는 금방이라도 창과 검을 든 전사들이뛰어나올 것만 같았다.

마케도니아의 청년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원정에 나설 것이라는 소문이떠돌자 제국의 왕 다리우스 3세(이하다리우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더니, 어디 애송이가 대 제국 페르시아를...."

다리우스는 말할 것도 없고, 많은헬라스인(그리스인) 조차 알렉산드로스 를 무모한 젊은이라고 치부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런 민심을 일거에뒤집을 수 있는 전투가 바로 첫 번째 싸움 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그라니코스강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창을 들고 선두에서서 강을 건너, 페르시아 군과 벌어진육탄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아수라장 같은 전투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지만 결국 승리했다.

그의 전략은 적중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신(神)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가며, 이 전투는 페르시아 군의 사기를 꺾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그라니코스강 전투 후, 알렉산드로스는"전투할 때는 무섭지만 승리 후에는 온유하다"라는 평소의 소문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명령을 내린다.

당시, 페르시아에는 많은 그리스인 용병(傭兵)들이 있었다.

그는 페르시아 포로들은 대부분 그리스에 노예로 보냈다.

그러나, 자신에게 대항했던 용병 포로18,000명은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했다.

무시무시한 학살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조국 헬라스에 창을겨눈 그들은 배신자들로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페르시아와 두 번째 전쟁은 이수스에서 있었다.

이수스 전투는 의외로 빨리 결판이 났다.

페르시아의 대규모 전차 군단은 지형을적절하게 이용한 마케도니아의 기병과보병에게 순식간에 무너졌다.

후방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다리우스는방어진이 무너지자 황급히 전장을 빠져 나갔다.

그리고,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의 마지막 결전인 가우가멜라 전투가 서서히 다가온다.

다리우스는 페르시아에 총동원령을 내려 군의 전열을 가다듬고, 가우가멜라에서 승부를 결정지으려 했다.

가우가멜라는 페르시아어로 "낙타의 집" 이라는 말이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마케도니아 군사는5만이었고 페르시아는 30만이었다.

마케도니아 진영에서 바라본 페르시아 군대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드넓은 평원에 늘어선 페르시아 군대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병사들의 함성과 말 울음소리가 대지를뒤덮었고, 수십만 명의 병사들이 든 장창은 거대한 숲을 이루었다.

신중하고 명석한 노장 파르메니오 장군은 "페르시아 군의 위용을 보면 아군 병사들의 사기가 심각하게 떨어질 것이다" 라는 의견을 제시하며 야간 기습 작전을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작전 회의에 참석한 마케도니아의 모든지휘관들도 파르메니오 장군의 의견에 적극 찬성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수적 열세를어둠으로 가리자"라는 장군들의 제안을 즉시 거부하며, 역사 속에 찬란히 빛나는불후의 명언을 남긴다.

"나는 승리를 훔치지 않는다."

<풀르타르코스 영웅전>은 대결전이 있던 그날 아침 참모들이 알렉산드로스 의 막사를 방문했을 때, 그는 깊은 잠에빠져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파르메니오 장군이 왕의 이름을 두세번 불러 깨웠다.

기가 막힌 그는 알렉산드로스가 잠을깨자 "도대체 어떻게 되었기에 일생일대의 큰 싸움을 앞두고 이렇게 늦잠을 잘 수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다리우스를 추격하느라 이 광활하고황량한 나라를 더 이상 헤매지 않게 된것만으로도 우리가 승리한 것 아니오?"

전투를 준비할 때나, 또, 실제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나 한결같이 보여주었던 그의 의연함은 실로 초월적(超越的) 기상(氣像)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기원전 331년 10월 1일, 가우가멜라평원에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먼저 공격을 시작한 쪽은 마케도니아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주력 부대를 이끌고오른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자 페르시아 기병이 이를 포위하며 싸움이 격렬해졌다.

초반에는 페르시아 기병이 강력한 힘을발휘하며 마케도니아 기병을 압도했다.

특히,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페르시아의 "박트리아인 기병대"가 마케도니아 군을 맹렬히 공격해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박트리아 기병대는 파르메니오 장군이지휘하는 마케도니아 군의 왼쪽 날개를꺾으며 그를 크게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포기하지 않고필사적으로 싸워 끝내 페르시아 군의방어선을 뚫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때 멀리서 근위기병대에 둘러싸인 다리우스 왕을 처음 보았다.

높다란 전차 위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은"키도 훤칠하고 얼굴도 잘생긴 헌헌장부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세가 오른 마케도니아 군은 당시 무적이라 부르던 페르시아 칼날 전차 부대를전멸시켰다.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다리우스는 말머리를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점령한 후에도 다리우스의추적을 멈추지 않았다.

다리우스는 측근 근위병과 박트리아기병대의 호위를 받으며 계속 도망을쳤다.

기병대는, 결국, 그들의 본거지인 박트리아까지 다리우스를 피신을 시켰다.

기병대의 대장은 벳소스였다.

그는 다리우스가 박트리아 태수로 임명한 측근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양과 같았던 제왕의 쫓기는 모습이 그에게초라하고 하찮게 보였다.

그의 마음속에서 주제넘는 음험한 욕망 이 꿈틀거렸다.

벳소스는 창을 들어 주군을 찔렀다.

그리고, 벳소스는 스스로 페르시아의 왕이라 칭하였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다리우스의 시신을 발견한 알렉산드로스는 깊은애도를 표하고, 입고 있던 자신의 외투를벗어 덮어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다리우스를 벌(罰)할 수 있는 사람은 나 알렉산드로스뿐이다."

분노한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 병사들에게 세상 끝까지라도 추격해서 반드시 배신자 벳소스를 체포하라고명령했다.

얼마 후, 벳소스는 생포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페르시아 관례에 따라 사지를 찢어 죽이는 극형(極刑)에처하게 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그 형벌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곧은 나무 두 그루를 서로 닿도록 구부려 각각의 나무에 사지를 일부씩 묶은 다음 놓아버리자 나무들이 원래 모습으로 튀어 오르며 그 반동으로 거기에매달린 사지가 찢어졌다."

알렉산드로스가 다리우스의 시신을 왕의 휘장으로 장식하여 그의 어머니에게 보내며, 200년 넘게 서아시아를 지배 했던 페르시아 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물러났다.

지난 몇 주 동안, 우리 사회는 생소한 정치 이슈로 인해 몹시 소란스러웠다.

29명의 민주당 국회의원이 자기당 대표 의 체포 동의안에 "가"표를 던져, 가결되므로 당원들로부터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재명 대표가 법원의 영장 기각으로구속은 피했지만 이들에 대한 비난은 쉽게 수그러들 것 같지 않다.

현대 민주 사회에서는, 고대나 근세 시대 와 달리, 배신에 대한 정의(定義)가 그렇게 간단치 않다.

한걸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상황에따라서는 민주당 국회의원 대부분이체포 동의안에 찬성표를 던질 수 있는사람들이라고 봐도 큰 무리가 아니다.

인간은, 특히 정치인은, 근본적으로 이해 관계에 따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파문의 책임자를 처벌하려면, 최소화한 대상자를 신속하게 처리해불필요한 당내 분란을 차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