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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IL PRINCIPE 의 재해석(再解釋)

저녁 8시가 넘어서야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보는 피렌체는 서서히노을이 지기 시작한다.

피렌체는 "붉은색 꽃의 도시"라는 말로, 갈리아 원정을 떠나던 줄리어스 시이저가 붙여준 이름이다.

그 붉은 도시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에는, 해질녘 미켈란젤로 언덕위에 오르는 것보다 좋은 장소가 없다.

조금씩 샤프란 색으로 물들어가는 아르노강과 두오모 성당을 감싸고 있는 피렌체는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찬란한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는잠들기를 원하지 않는 듯 어둠이 내리기시작하면 더 매혹적으로 다가오며 가슴뛰게 한다.

피렌체는 천재들의 도시다.

중세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새로운문명을 창조했던 피렌체의 천재들 중에는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 iavelli:1469년-1527년)도 있다.

강너머 회색빛 산타크로체 성당에는미켈란젤로, 갈릴레오, 단테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무덤이 있다.

과학과 정치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한 성당에 나란히 묻혀 있는 것도 참 흥미롭다.

갈릴레오의 역학(力學)이 현대 과학의기초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마키아벨리는 정치학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5/16세기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는 흔히 5대 강국이라 불리던 밀라노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로마교회국가(로마냐) 그리고 나폴리 왕국 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 국가들은 자신들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동맹을 맺고 때로는 서로 싸우며 불안한 공존을 유지했다.

다섯 나라 중 중부의 교회국가인 로마냐는 교황청에 세금을 바치며 권력을 이양 받아 행사하는 사실상 교황의 지배하에 있던 국가였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의 외교를 담당한공직에 있던 시대 교황은 알렉산데르 6세였다.

에스파니아 출신으로 권모술수에 뛰어났던 알렉산데르 6세는, 마음속에 로마냐를 직접 통치하며 교회의 권위를 회복 하고 강력한 국가로 성장시키고 싶어 했다.

그에게는 내연녀 반노차 카타네가 낳은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1475년-1507년)라는 사생아가 있었다.

교황은 원래 체사레 보르자를 성직자로키우려 했다.

막강한 아버지의 후광 덕에 그는 18세에추기경의 지위까지 올랐다.

그러나, 교황은 마음을 바꿔 아들 체사레 가 직접 로마냐의 지배자가 되어 통치 하기를 원했다.

어머니를 닮은 준수한 미남 청년 체사레보르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역사상 최초로 추기경을 사퇴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성경을 내려놓고 칼을 들었다.

그런데, 그는 놀라울 정도로 정치적인인물이었다.

얼마 전까지 성직자였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체사레는 탁월한 정치 감각을 보이며 거침없이 로마냐의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그는, 또, 용의주도하고 잔인했다.

그의 악행은 범상치 않아 형제고 친척 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서슴없이 처단 했다.

자신이 고용하고 있던 용병대장 4명이페루자, 볼로냐와 내통해 돌연 반란을일으키자 그는 전광석화처럼 이를 진압하고 주동자들의 가족까지 모두 처형해버리는 잔혹함을 보이며 주위를 공포에떨게 했다.

체사레 보르자는, 드디어, 발렌티노 공작이라 불리는 실질적 로마냐의 군주가 되어 아버지의 오랜 꿈을 이룬다.

야심만만한 젊은 지도자의 공격적이며도발적인 행보는, 당연히, 주위 국가들을아연 긴장시켰다.

이런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1501년 피렌체의 지배하에 있던 지방, 알레초와 카이나 계곡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반란의 배후 조종자는 체사레 보르자였다.

그의 영토 확장에 대한 야욕이 바로 피렌체의 턱밑까지 다가온 것이다.

놀란 피렌체는 서둘러 우호적 관계에 있던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체사레는, 프랑스의개입에 위협을 느꼈는지, 갑자기 피렌체 측에 화의를 제시하며 알레초를 돌려 준다.

당시 이 교섭을 이끌었던 피렌체 대표가 바로 마키아벨리였다.

그는 1502년 6월 25일 로마냐의 우르비노 궁정을 방문하여, 며칠 동안 머물며체사레와 처음 대면하게 된다.

참으로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우리가 읽고 있는 <군주론>은 마키아벨리가 그때 만났던 체사레 보르자를모델로 쓴 저서이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가 체사레에게 얼마나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교섭을 성공적으로 마친후 그가 로마냐 정부에 보낸 편지를 보면 실감할 수 있다.

"공은 궁정인으로 당당하고, 군인으로서는 매우 진취적인 기상을 띤다. 영광과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쉴 줄도 피로도 모른다. 어디서 출발했는지 동에 번쩍서에 번쩍 신출귀몰하다. 이런 모든 것들이 공을 두려운 존재이게 하고, 싸우면 늘 승리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를 도덕적으로 위대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강력한 사람"이라 생각 했고, 선악이라는 잣대로 평가하기 전에"행위적 인간"이라 판단했으며, 그 행위적 인간만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체사레의 잔인함은 로마냐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 그 지방을 통일하여평화와 충성을 지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어쨌든, 권력정치가인 체사레는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고, 체사레의 풍모는 그의 붓에 의해오래도록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군주론>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짤막하게 주제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군주는 사랑 받는 것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 중 어느 것이 좋은가? 누구나 양쪽을 다 갖추었으면 하는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구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만일 그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사랑받는 것보다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훨씬 안전 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래 위선적이라단순히 은혜로 맺어진 애정쯤은 자기와이해관계가 얽히면 쉽게 배신을 한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들 자신이 보복이라는 공포로 묶여있어 등을 돌리는 일이 결코 쉽지않다."

독자들은 인간의 심정 밑바닥에 숨어 있는 욕망, 허영, 부정직 그리고 변절 같은 요인들을 가감없이 들추어 낸 마키아벨리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 한다.

그의 저서 내용처럼 그를 "권력 사용의기술자, 얼음처럼 차가운 합리주의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가리지 않는 타산적 현실주의자"라고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분명히 <군주론>은 모순(矛盾) 의 책이다.

무엇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제를 혐오 했던 공화주의자였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냉혹한 이미지는 그의 정치 이론적 저서, 특히, <군주론> 과 <정략론>으로 독자들의 시야가 한정되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사상에 대해 좀 더 깊이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다른 여러 저서들도 함께 읽어 봐야 한다.

그는 로마의 공화정을 무너뜨린 줄리어스 시이저를 아래와 같이 혹평했다.

"시이저에 의해 공화정이 사실상 끝나면서 제정(帝政)으로 옮아가고, 로마는악덕과 타락의 심연으로 빠져들어 갔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많은 군주들의 무능과 부도덕함을 지켜보았던 마키아벨리는, 어쩌면, 운명적으로 군주제를좋아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군주론>은 많은 함정이 있는 책으로 조심스럽게 읽어야 한다.

이 책은 공직에서 쫓겨난 후 오랫동안야인 생활을 하던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의 지배자 줄리아노 데 메디치에게 다시일하기를 기대하며 헌정하려 쓴 이력서와 같은 책이다.

따라서, 이 저서는 자신의 사상을 이야기 한 것이라기 보다는, 줄리아노의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해 상당한 과장이 있었다고보아야 한다.

그는 <군주론>에서 " 군주는 쓸데없는 관용을 베풀지 말아야 하고 인색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재미있는 것은 마키아벨리 자신은 그런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았다.

그의 삶에 대한 이런 기록이 있다.

"그는 셈에 밝은 인물임에도 호인이어서사사로운 정이나 인간관계에는 느슨하기한량없고, 친구들에게는 성실하고 정이 많은 다변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