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에 눈이 내리면
지난봄 4월 3일, 러시아 문학 연구의선구자로 평가받는 고려대 박형규 노어과 교수가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그가 소개한 러시아의 많은 작품들 중, 특히, 고 박형규 교수는 톨스토이 문학에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나도 그가 번역한 톨스토이의 <인생론> 을 읽은 일이 있다.
특히, 박 교수가 그 책의 서론에 "톨스토이가 한국 문학에 끼친 영향"에 대해 쓴 글이 있는데, 상당히 흥미로웠고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는 "톨스토이는 1910년 이후 일제와해방 전후 세대 우리 지식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문학자이자 사상가 중 한명이었다."라고 주장했다.
많은 지식인들이 표출하기 어려운감정과 무기력한 삶의 고통을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읽으며 달랬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 중에서 톨스토이와 특별한 문학적공감을 이루었던 인물이 시인 백석이다.
백석은 암울한 그 시대에 사람들로부터남다른 사랑을 받았던 시인이었다.
윤동주가 백석의 시집을 구하지 못해노트에 적어 그의 시를 외웠다는 이야기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의 시 중에서 지금까지 대중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는 단연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중략)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위 시의 두드러진 시어(詩語)는 "눈"과"흰 당나귀" 그리고 "나타샤"다.
세 단어가 어우러져 환상적이며 아름다운 백색의 시 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중에서도 사랑의 대상인 미지의 여인 나타샤는 이국적인 신비로움까지 연출 하고 있다.
독자들은 시인이 나타샤라는 이름을 어디서 차용(借用)했는가에 대해 궁금해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러시아 문학을동경했던 백석이 톨스토이 작품 <전쟁과평화>의 등장인물 "나타샤 로스토바"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전쟁과 평화>는 단순한 로맨스 소설은 아니지만, 여주인공 격인 나타샤의 비중이 적지 않다.
200명이 넘는 등장인물들과, 작가가러불전쟁의 현장을 답사하고 사료(史料) 를 정리하며 쓴, 펭귄 영문판이 1400 페이지에 가까운, 이 대작은 다큐멘터리전쟁사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톨스토이 자신도 <전쟁과 평화> 출판 후 6년이 지난, 1875년에 발표한 "<안나 카레니나>가 내 진정한 첫 번째소설이다"라는 말을 했다.
전쟁사를 쓰며 가상의 인물들을 등장시키다 보니, 작가 자신의 의도와 달리 전쟁과 로맨스가 결합된 위대한 명작이 탄생한 셈이다.
당연히, 소설은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과 러시아군 총사령관 쿠투조프와 전투장면 묘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전쟁의 광풍 속에서 부침하는 볼콘스키, 로스토프, 베주호프 세 귀족 가문 인물들의 파란만장한 삶이 작품의 큰 흐름을 이끌어 간다.
세 가문의 아들들 안드레이 볼콘스키, 니콜라이 로스토프 그리고 피에르 베주호프는 친구 사이다.
1805년 안드레이와 니콜라이는 조국 러시아를 위해 몸 바치겠다는 각오를 갖고 전쟁에 참여한다.
그들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프랑스 군에게 크게 패하고말았다.
안드레이는 그동안 자신의 가슴을뜨겁게 불태웠던 영웅적 전사의 모습이 무참히 허물어지며 인생의 덧없음을느끼고 귀향을 한다.
설상가상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잊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겠다는 그의 의지는, 아내 리사가 산후통으로 죽으며 산산조각이 난다.
좋은 성품과 학식 그리고 물려받은 큰재산까지 있는 안드레이였지만, 인생의 목표를 상실하고 허무주의에 빠져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안드레이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 함께 참전했던 친구 니콜라이 의 집 로스토프 가를 방문하게 된다.
그 곳에서 그는 니콜라이의 여동생 나타샤를 만난다.
그녀는 밝고 명랑한 소녀였다.
안드레이는 나타샤를 처음 본 순간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생각을 한다.
그만큼 나타샤는 안드레이에게 충격적인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나타샤도 명문가의 준수한 모습의 오빠 친구에게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약혼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은 뜻밖의 어려움에부딪히게 된다.
안드레이의 아버지 볼콘스키 공작은 자신의 아들이 좀 더 나은 집안의 여자와결혼하기를 원하며, "꼭 하려거든 1년 동안 기다려보고 그때 결정해라"라며승낙을 유보했다.
아버지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던 안드레이는 이 사실을 나타샤에게 알리고 마음을 달래려 이탈리아로 떠난다.
안드레이의 아버지가 자신과의 결혼을 반대한다는 것을 알게 된 나타샤는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명랑하고 노래하기 좋아하는 나타샤가 갑자기 말이 없어지고 우울한 모습으로변해버렸다.
그렇게 실의에 빠져있던 나타샤에게 새로운 남자가 찾아온다.
모스크바 사교계에서 미남 장교로 소문이 자자한 아나톨리였다.
그는 안드레이의 친구 피에르 베주호프 의 아내 엘레나의 오빠다.
머릿속은 텅 비어 있고 하루 종일 몸단장만 하는 모스크바 사교계의 거물엘레나와 아나톨리는, 난잡한 사생활이하나같이 닮았다.
아나톨리는 비밀리에 결혼까지 하고총각 행세를 하며 순전히 재미를 위해 나타샤를 유혹한 것이다.
나타샤는 가출해 살림을 꾸리자는 아나톨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야반도주 하기로 결심을 한다.
나타샤의 이런 도발적 행동은 볼콘스키공작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사교계에서 은밀하게 떠돌던 이 소문을 피에르가 듣게 된다.
피에르는 격노했다.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허영에 찌든 아내를 늘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던 그는, 그녀의 오빠가 친구의 약혼녀까지 손대려하자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피에르는 모스크바 이곳저곳을 다 뒤져아나톨리를 찾아낸다.
그는 반발하는 아나톨리에게 강력하게경고한다.
"당신은 지금 잠시 동안의 쾌락을 위해 한 여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리고있소. 당장 그만두고 모스크바를 떠나시오"
아버지 베주호프 백작으로부터 물려 받은 막대한 재력과 열정적인 피에르의성격을 아는 아나톨리는, 그의 협박에 가까운 충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피에르로부터 여비(旅費)를받아든 아나톨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향해 모스크바를 떠났다.
피에르는 나타샤를 찾아가 아나톨리는 자신의 처남이며 비밀 결혼을 한 난봉꾼이라는 말을 해준다.
절망에 빠진 나타샤는 비소(arsenic)을 먹고 자결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친다.
염문은 순식간에 모스크바 사교계로 퍼져 나갔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안드레이는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다시 전쟁터로돌아간다.
그리고, 치명적인 중상을 입게 된다.
한편, 나타샤는 안드레이에 대한 어리석은 배신의 회한을, 부상병 치료를 위해개방한 자신의 집에서, 열성적으로 환자 들을 돌보며 잊으려 애를 쓴다.
운명이란 이런 것인가.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안드레이가 기적같이 나타샤의 집으로후송된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까지 진격을 해 왔고, 모스크바 시민들은 피난길에 오른다.
그리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피난길에서, 나타샤의 헌신적인 간호를 받으며 안드레이는 평온하게 죽었다.
훗날, 나타샤는 상처(喪妻)한 피에르 와 결혼하여 평범한 러시아의 여인으로 늙어 간다.
백석의 주위에 있던 여러 여인들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나타샤는자신이라고 말했다.
성북동에서 요정을 하던 김영한은 다른여인들과 달리 행동하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비록, 자신의 눈앞에 백석이 없었지만 인생의 모든 것을 바쳐 그와의 사랑을 키워 갔다.
일본 아오야마 대학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교사로 근무하는 백석을 닮으려, 그녀는 바쁜 가운데에서도 중앙대학교영문과에 들어가 틈틈히 공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