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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과 방랑의 시인 릴케

지난 2월 16일은 민족 시인 윤동주가, 1945년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지 만 79년이 되는 날이었다.

윤동주는 모두가 좋아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가 살았던 삶이 그의 시처럼 순결했다.

풍부한 역량을 갖고 민족 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했던 많은 지식인들이 일제의협박과 회유에 무릎을 꿇었던 부끄러운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변절의 이름들은 구태여 일일이 언급할필요도 없다.

윤동주는 그 엄혹한 시절에, 일제에 저항 하며, 조국의 해방을 꿈꾸며 고고한 시인의 길을 걸어갔던 몇 안 되는 아름다운청년이었다.

그의 시 중에서, 특히,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별 헤는밤"은 마치 시 속의 별처럼 찬란히 빛난다.

이 시를 썼던 시기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즈음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어디서 별을 보며 이처럼 아름다운 시를 썼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기도 한다.

윤동주에 대한 기록에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있다.

"동주는 인사동 거리를 좋아해 자주 그 곳을 걸었으며, 집에 갈 때는 청운동을 지나 인왕산 끝자락 언덕까지 걸어와 시간을 보내다 누상동 하숙집으로 갔다."

지금 창의문(자하문) 근처에 있는 "시인의 언덕" 공원은, 동주가 그 언덕에서 별을 보며 "별 헤는 밤"을 썼다는 주장을 근거로 조성되었다.

윤동주가 백석의 시를 흠모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별 헤는 밤"은 백석의 "흰 바람벽이있어"에서 영감을 얻고 차용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아래 시구절을 비교하며 읽어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씨스 쨈'과 도연명과'라이너 마리아 릴케' 가 그러하듯이"

-별 헤는 밤- 윤동주"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시인(詩人)들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위 시구에서 백석과 윤동주의 시 세계를연결시켜주는 이국 이름의 두 시인이 눈에 띈다.

두 사람 중에서, 특히, "라이너 마리아릴케(Rainer Maria Rilke)"는, 이제, 시를 사랑하는 우리 독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외국 시인 중 한 명이 되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그의 시 뿐만 아니라, 소설 <말테의 수기>로도 친숙한이름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말테의 수기>에 대한 다소 민망한 기억이 있다.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작품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읽기 시작했는데, 그난해함에 실망하고 깜짝 놀랐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 말테의 수기>는 몰락한 덴마크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주인공 말테가 대도시를 동경하다 파리에 와서, 자신이 꿈꾸던도시와는 너무 다른 비인간적이고 위협적인 모습에 절망하는 내용이다.

나중에 관련된 평론을 읽다가 알게된사실이지만, 이 작품은 사르트르의<구토>나 카뮈의 <시지프스>와 같이다가가기가 만만치 않은 소설이다.

어쨌든, <말테의 수기>를 읽은 후, 나는 시인 릴케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갖고 그의 작품과 삶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릴케는 1875년 프라하에서 철도회사직원인 아버지와 고위 관료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년 시절을 거치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육군 고등실과 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릴케는 몸이 약하고 시를 쓰고 싶은 욕망으로, 군사학교를 중퇴 하고 프라하 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여공부했다.

1897년, 그는 더 넓은 세상에서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을 갖고 뮌헨으로 왔다.

그해 22살의 릴케는 운명적으로 15년연상인 37살의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를 만나게 된다.

당대 유럽 지식인들의 뮤즈였으며 하인베르크의 마녀라 불리던 그녀는 릴케의 문학의 비상(飛上)을 이끌어준 여인이었다.

살로메는 그때까지 릴케의 프랑스식이름이었던 르네 마리아 릴케(Rene Ma- ria Rilke)를 독일식인 라이너 마리아릴케(Rainer Maria Rilke)로 바꾸라고 조언을 해준다.

오래전 20대 초반에 프리드리히 니체의 청혼을 단호히 거절하며 "나는 이제 니체에게 배울 것이 없다"라며 그를 떠났던살로메는, 역시, 놀라운 혜안을 갖고 있는 유럽 문화계의 거물었다.

릴케는 살로메와 함께 1899년, 1900년 두 번에 걸쳐 러시아를 여행했는데, 그는 그녀의 주선으로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를 만나 문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된다.

팜 파탈(femme fatale)적인 살로메는한 평생 남자에게 사사로운 정을 주지 않았다.

니체의 청혼을 거절했듯이, 그녀는 후에 만난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죽을 때까지 정신적 교류를 했지만, 육체적 관계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살로메는 지적 교제를 추구하는 사람과섹스 파트너와의 구분을 철저히 했다.

프로이트의 청혼을 거절하며 그의 젊은조수와 염문을 뿌린 것은 그녀의 남자에 대한 철학이 어떠했는지 가감 없이 보여준 예(例)라고 볼 수 있다.

릴케와 살로메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나이 어린 릴케는 살로메와 육체적 관계를 맺고 있던 사이로 짐작된다.

그러나, 릴케가 자신에게 애정을 갖고집착하는 모습을 보이자, 살로메는 가차 없이 등을 돌리며 그를 떠났다.

복잡한 감정의 혼란 속에서 릴케는 여류조각가 C. 베스토프와 결혼했지만,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살로메의 존재는 너무 컸다.

살로메는, 어쩌면, 릴케에게 연인이었고, 한편으로는 지식의 어머니 같은 존재였는지 모른다.

그는 자신을 "르네 릴케"에서 "라이너릴케"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고, 문학의지평을 넓혀주며 꽃 피게 해준 살로메를 향해, 그의 시 "내 눈을 감기세요"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내 눈을 감기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중략)

1902년, 릴케는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요청을 받고 파리에 온다.

로댕의 비서로 일 년 남짓의 짧은 기간 동안 일했지만, 릴케의 문학은 로댕의 예술 세계와 만나며 다시 한번 도약을 하게 된다.

릴케는 로댕이 사물에 대해 끊임없이탐구하고, 또, 수공업자 같은 성실한 작업에 의해 한 작품을 완성시키는 과정을 지켜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로댕으로부터 "진정한 예술이란번뜩이는 영감이나 천재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갈고닦는 노력에서비롯된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실제로, 로댕은 작품의 창작과 예술가의 영감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단호하게 말했다.

"영감(靈感)은 없다. 다만, 작업(作業)만 있을 뿐이다."

더 나아가, 파리의 고독한 생활은 릴케를 인간 실존(實存)의 깊은 사색의 길로이끌며 그의 문학을 한층 더 성숙시켰다.

소설 <말테의 수기>는 그때 파리의 체험적 경험의 바탕에서 태어났다.

릴케는 1919년 어느 문학 단체로부터초청을 받고 스위스를 방문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곳에 남아 계속 머무르게 된다.

만년에 릴케는 스위스의 세르 근처 산중에서 절대 고독의 세월을 보냈다.

백혈병을 앓고 있던 그는, 1926년 이집트에서 찾아온 여자 친구를 위해 장미꽃을 꺾다가 가시에 찔려 패혈증으로 고생하다가 그해 12월 51세로 죽었다.

죽기 1년 전에 유언처럼 준비해 놓은 그의 묘비 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겹겹히 싸인 눈꺼풀들 속익명의 잠이고 싶어라."

독일어로 쓰인 글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모호함 투성이의 문장이다.

릴케를 연구한 학자들 중에는 위 글이"종교나 이념 그리고 관습에서 해방된자유"를 노래한 것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파리의 지하철 "바렌(Varenne)역"에서내리면 2분 거리에 로댕 박물관(Musee Rodin)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