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국지색(傾國之色) [2]
오왕 합려는 춘추의 5패국 중 한 나라인, 강대국 초나라를 굴복시킨 후 교만이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그는 기고만장하여 이렇게떠들었다. "중원 천지에 나라가 많되 천하를 호령할수 있는 왕은 오직 오왕인 나뿐이다."
군사 손무는 점령지 초나라에서 보인 왕의 경거망동과, 전쟁 후 어리석은 교만을 바라보며 오나라를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친구 오자서를 불러 자신의 결심을 이야기했다. 오자서는 손무의 손을 붙들고 눈물로 만류한다. 오자서는 손무의 존재가 오나라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가 오나라의 군사(軍師)로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나라들을 떨게 만들었다.
사실, 제나라 사람인 손무가 오왕 합려를 위해 일할 이유가 없다. 그가 오초 대전에참여한 것은, 다만, 친구 오자서의 간곡한부탁이 있었고, 자신이 지금까지 연구한병법을 실전에 적용해 보고 싶은 마음에서였을 뿐이다.
손무는 오왕 합려에게 고향에 있는 노부모가 병환이 깊어 제나라로 돌아가야겠다는상소를 올렸다. 그렇지 않아도 전쟁이 끝난 지금까지 군사의 자리에 거목처럼 서 있는 손무를 부담스럽게 느끼고 있던 오왕은 곧바로 이를 허락해 버린다. 손무는 간단한봇짐 하나만 들고 지체 없이 제나라를 향해 길을 떠난다.
오자서는 원래 천하의 표랑객(漂浪客)인손무가 다시는 오나라를 찾지 않을 것을 알고 있어 슬픔이 더 했다. 잡고 있는 손을 놓지 못하고 있는 오자서를 위로하며 손무는 의미심장한 말을 해준다. 오자서와 같은 초나라에서 망명해와 망향의 그리움을 함께 나누었던 백비에 대한 이야기였다. "백비의 관상은 반상(叛相)이오. 그가 언젠 가는 친구를 해하려 할 것이니, 부디 조심 하기 바라오."
옛날부터 오.월(吳越) 양국은 앙숙지간이었다. 당시 월왕 윤상은 야심이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손무가 버티고 있을 동안에는 감히 오나라를 넘겨다볼 생각조차 못했다. 그러나, 손무는 제나라로 떠나 버리고, 오초대전에서 승리한 합려는 정사는 제쳐두고 주색에 빠져 있다는 소식을 듣고 생각이 크게 달라졌다. 지금이야말로오를 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다.
그러나, 인간사는 내일 일을 모른다. 월왕윤상이 별안간 병으로 쓰러진 것이다. 그는임종이 가까워지자 태자 구천을 불러 아래와 같은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내가 죽거든 태자는 나를 대신하여 반드시 오를 정벌하라. 우리 월은 지정학상 오를치지 않고는 절대 번영할 수 없다."
당시 월에는 춘추전국 시대 최고의 책사(策士)라 할 수 있는 범려와 명재상 문종이 있었다. 월의 신왕 구천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국력을 쏟아 군사력을 강화했다. 그리고 오의 군대가 주둔해 있는 국경지역 용문산에서 계속 도발을 감행했다. 보고를 받은 오왕 합려는 대노했다. 곧바로 중신 회의가열리고 대책을 숙의했다.
오자서는 "월에는 뛰어난 책사 범려와 재상 문종이 있는데 무슨 속셈이 있는지 먼저파악해야 된다"라며 성급한 출병을 반대 했다. 그런데, 백비가 오자서의 의견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나섰다. 오랫동안 충실하게따르던 백비가 드디어 오자서에 대한 시기 와 질투의 본심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백비는 합려의 마음속에 있는 정복욕을 자극하는 현란한 말솜씨로 열변을 토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구천이함부로 덤벼오고 있습니다. 이는 필시 월나라가 망할 징조입니다. 차제에 월나라를송두리째 없애 버림이 옳은 줄로 아룁니다"
오왕은 오자서의 의견을 버리고 백비의주전론을 받아들였다. 그는 백비와 전의를좌우익 대장으로 삼고 태자 파진과 함께월 정벌의 장도(壯途)에 올랐다. 오왕 합려는 무슨 이유인지 오자서를 출병에서 제외시키고 후방에 남게 했다. 그는, 아마, 월왕 구천을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로 보았던것 같다. 월의 책사 범려는 오자서가 출병에서 빠졌다는 정보를 듣고 쾌재를 불렀다.
싸움은 오왕의 생각 같지 않았다. 오랜 훈련을 거친 병사들과 탁월한 책사 범려가 있는 월군은 의외로 강했다. 그런데 밀고밀리는 전투 중에 오의 태자 파진이 전사하는 중대한 변고가 발생했다. 결국, 이성을 잃은 오왕 자신도 범려의 전략에 말려들어치명상을 입고 만다.
오왕 합려는 위기의 순간이 닥치차 불현듯손무 군사가 떠올랐다. 그는 신음하듯 하늘을 보며 한탄했다. "아- 손 원수가 지금 여기 있었다면... 내가 왜 그를 제나라로 보냈단 말인가!" 오왕 합려는 결정적 위기가 닥치자 비로소 손무가 위대한 인물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왕이 위독하다는 급보를 받고 오자서와 둘째 아들 부차가 전선으로 달려왔다. 가슴과 어깨에 창을 맞은 왕은 이미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오자서의 손을 잡은 왕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오명보의 충고를 듣지 않아 태자를 잃고 나도 죽게 되었소. 내가 죽거든 경은 부차를 도와 나의 원수를 꼭 갚아 주기 바라오." 그는 아들 부차에게도 반드시 원수를 갚으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부차는 죽어가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흐느껴 울며 맹세했다. "아버님의 말씀은 결단코 잊지 않겠습니다." 그날 이후 신왕 부차는 장작 위에서 잠을자며(臥薪 와신: 장작 위에서 잠을 자다), 신하들에게 인사 대신 "부차여 그대는 아버지를 죽인 구천을 잊었는가"라는 말을 들려주도록 부탁했다.
복수를 서두르는 부차를 말리며, 오자서는 차분히 군사력을 강화하며 때를 기다리도록 했다. 다행히 부차는 선왕 때부터 충성스럽고 용맹한 오자서를 의지하며 따랐다. 그리고 때가 되자 오는 오자서를 총사령관으로 전의를 선봉장으로, 백비를 보가대장으로 삼아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월 정벌에나섰다.
오군이 쳐들어 오고 있다는 소식에 월의조정은 대책을 강구하느라 분주했다. 왕은 당장 출병하자는 강경론을 폈다. 대부 범려는 젊은 혈기만 믿고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월왕 구천에게, 수비에 치중하며 전면전을피하라고 간언했다. 구천이 오자서의 적수가 아니라는 것을 범려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천은 범려의 충언을 무시하고, 직접 군을 지휘하여 부초산에 진을 치고 오군을 기다렸다.
싸움이 시작되자 명장 오자서의 지용(智勇 )은 다시 한번 빛났다. 초반 우열의 가늠이어렵던 싸움이, 오의 위세에 월군은 점점 무너지며 패색이 짙어져 갔다. 월왕 구천은후퇴하기 시작했다. 오자서는 승기를 잡은지금이 월군을 섬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고,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추격의고삐를 당겼다.
위기에 몰린 월왕 구천은 후방에 있던 범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범려는 구천에게회계산(會稽山)에 병력 1만 명을 매복해놓을 테니 그곳으로 들어오라고 알렸다. 쫓기던 구천은 회계산으로 들어가고, 매복해 있던 월군은 추격하는 오군을 급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천을 쫓던 오자서는 회계산의 지형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오자서는 숲속에 월의 매복군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는 오왕 부차에게 즉시 증원군을 요청했다. 그리고 오자서는 추격군과 증원군에게 회계산을 속히포위하라고 명령했다. 순식간에 회계산은5중 10중으로 포위되었다. 졸지에 월왕 구천, 대부 범려, 재상 문종을 포함한 월군은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어버렸다.
회계산은 지형이 워낙 험해 1만여 명쯤 숨어 있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많은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어려움은 식량이었다. 시간이 자기편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한 월왕 구천과 대부 범려는, 결사적으로 싸워 활로를 뚫어보 자는 결론을 내린다.
포위된 지 10여 일이 지난 어느 날 밤 오군은 기습 작전을 감행했다. 그러나, 이일을어쩌랴. 오자서는 식량이 바닥나고 있는월군이 필사적으로 돌파구를 마련하려 기습할 것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그는 군에 철통같은 경계를 명령하고, 월군의 기습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