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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8자·5분 남짓·경국지색(傾國之色)

경국지색(傾國之色) [4]

부차가 오자서를 죽였다는 소식이 소리 없이 퍼져나가며 오나라의 민심이 크게 동요 하기 시작했다. 충신 오자서를 죽인 수괴가월녀(越女) 서시라는 쑥덕공론이 빠르게퍼져나간 것이다.

서시는 깜짝 놀랐다. 명검 촉루(屬鏤)를 보내 오자서를 자결케 한 것은 극비리에이루어진 일인데, 백성들의 입에서 공공연하게 오르내리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지한 백성들이 자기에게 위해를 가하지않을까 은근히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월왕 구천으로부터 아래와 같은 비밀 편지가 전달되었다.

"서시야, 너의 노력으로 오자서를 죽게 만든 것은, 네 조국 월나라의 청사에 길이 빛 날 일이다. 이제 너는 부차로 하여금 속히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치도록 유도하기바란다." 이는 오나라를 치기 전, 제나라와 싸움을 붙여 군사력을 약화시키려는 월나라 군사(軍師) 범려의 치밀한 전략이다.

서시는 오자서의 자결 뒤 뒤숭숭한 민심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전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날부터 끊임없이 부차의 허영에 불을 지폈다. "대왕께서는 이미 남으로 월을 평정하셨고, 동으로 초를 굴복시켰으니, 이제 북으로 제나라만 평정하시면 만승천자(萬乘天子)가 되는 것 아니 옵니까?"서시의 가슴을 파고들며 속삭이는 말에 부차는 점점 현실감각을 잊고 망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오왕 부차는 드디어 군사를 일으켰다. 부차를 더 고무시킨 것은 제나라와 앙숙지간인 이웃 노나라가 제 정벌에 동맹군으로참여하겠다는 뜻을 전해 왔다. 부차는 백비를 군사로, 전의를 대장으로 삼아 24만 대군을 이끌고 제나라로 향했다.

오군은, 노나라 태제 계강자가 이끌고 온군사와 연합군을 형성하여, 제나라 대장전상의 15만 군과 애릉 계곡에서 맞섰다. 전투는 오래가지 않았다. 초반에 강력하게저항하던 제나라 군은, 전력의 열세를 극복 하지 못하고 대장 전상이 생포되며 항복하게 된다.

이렇게 부차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제나라에 대승을 거두었다. 부차는, 문득, 서시가말하던 "만승천자"라는 말이 떠올랐다. 눈치 빠른 백비는 이미 왕 부차의 속마음을 읽고 있었다. "대왕 전하! 시운(時運)을 놓치시면 안됩니다. 하늘이 대왕께 만승천자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여세를 몰아진(晉) 나라까지 정벌을 해야 합니다. 우선, 강주까지 진격하셔서 그곳에서 열국의 군주들을 모아놓고, 대왕의 만승천자 지위를선포하시옵소서."

부차는 백비의 말에 크게 기뻐했다. 그는강주로 진격해 황지(黃池)라는 곳에 진을 치고 각국 제후들에게 격문을 보내 모이도록 했다. 약소국 제후들은 분개했지만 오왕 부차의 기세에 눌려 모두 모여들었다. 다만, 진왕만이 병을 핑계로 재상 조앙을 보냈다. 부차는 성대한 주연을 베풀며 자신의 만승천자를 선포했다.

연회장은 중무장한 병사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야말로 공갈협박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 이때,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난다. 부차가 제후들에게 일일이 축배를따라주며 흥을 돋우고 있던 중, 백비가 급히 들어와 부차의 귀에 무슨 말인가를 속삭였다. 부차는 순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월왕 구천이 대군을 거느리고 지금 빈집이나 다름없는 본국으로 진격해 오고 있다는급보였다. 실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다. 너무나 긴박한 상황이라 오늘 밤 당장 철군을 해야 할 형편이다. 그러나 제후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틀림없이 공격해 올 것이다. 사태가 위급할 때면 늘 백비의 계교가 빛을 발했다. 그는 부차의 만승천자 선포축하를 가장해, 병사들이 횃불 행진을 한다며 신속하게 철군을 단행했다.

고소성에 무사히 도착한 부차는 전황을보고받았다. 월왕 구천에 맞섰던 미용 장군은 생포되고, 지금 군사들은 오강(吳江) 을 끼고 있는 입택성에서 대항 중인 상황이었다. 부차는 부랴부랴 서문소를 선봉장으로 전의를 보가 장군으로 삼아, 20만 대군을 이끌고 오강을 향해 출발하였다.

입택성을 공략하고 있던 월군측에, 철군한 부차가 20만 대군을 이끌고 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월왕 구천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범려를 바라보았다. 범려가 담담히 말했다. "부차의 시대는 오늘 밤으로 끝이 날 것입니다. 천도무친(天道無親) 상여선인(常與善人)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은 누구와 특별한 친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어질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장장 17년의 세월을기다리며 힘을 기른 우리와 낮이나 밤이나황음으로 세월을 탕진한 부차를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날 밤 월군은 수군 4만, 기마 군 5천, 병선이 1백여 척이었으며, 오군은 육군이 12만 명, 수군이 3만, 병선이 2백여 척이었다. 전체적으로 병력은 오군이 압도적 우위를 보였다. 그러나 오군은 긴 원정으로 지쳐있었고, 월군은 오랜 훈련을 견딘 최정예 부대였으며, 거기다 당대의 비범한 군사(軍師) 범려가 산처럼 버티고 있었다.

부차는 오강을 건너 입택성을 포위하고 있는 월군을 일시에 섬멸할 계획이었다. 어둠이 내리는 오강에는 살기가 충만했다. 전투 준비를 마친 양군은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회전(大會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5경 무렵 오강이 만조(滿潮)를이루자 월왕 구천이 삼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수적 우위로 밀어 부치던 오군은 점점 전선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오군이 도착하기 전부터 세밀하게 짜놓은 범려의 작전은 시간이 지나며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오의 대장 전의가 화살을 맞아 즉사하고, 얼마 후 선봉장 서문소 마져 전사하고 말았다. 두 지휘관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오군을 향해, 범려가 깃발을 들어 올리니 강가에매복해 있던 후용과 고여의 병사가 일제히돌진하여 총공격을 가했다.

월군의 질풍 같은 공격에 오군 병선 2백여척은 순식간에 대부분 전복되고 말았다. 오군의 시체가 강을 메우고 강물은 피로 붉게물들었다. 백비는 부차를 보호하며 급히 상륙하여 병사들에게 총퇴각을 명령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부차는 후퇴하는 중에 매복해 있던 월의 장군 역성에게 일격을 당해 거의 전멸하고, 소주성까지 도망친 병사는 겨우 기마병 4, 50기에 불과했다. 부차는마상에서 부하들을 돌아보며 눈물로 탄식 했다. "내가 왕위에 오른지 20여 년, 군사를 일으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거늘, 지난밤 20만 대군을 오강에 장사 지내 버렸으니 이는필시 하늘이 나를 버린 것이 분명하구나."

백비는 살아남은 장수들과 소주성에 있던 4, 5만 명의 병사들에게 성을 굳게 지키게 하며 응전을 최소화하는 철저한 수성(守城) 작전을 폈다. 소주성을 포위하고 있던 월왕 구천은 공격을 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오군을 바라보며 조금씩 초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군사 범려에게 물었다. "시간을 끌수록 우리에게 불리한데, 이를 어쩌면 좋소?"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범려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화공(火攻)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무고한 백성의 생명과 재산에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으니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구천은 크게 화를 내며 범려를 나무랐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국에 오국 백성이뭐 그리 대단하다는 말이오? 오늘 밤이라도 강풍이 불면 당장 화공법을 쓰시오. 이것은 군왕인 짐의 명령이오."

범려는 자신으로 인해 많은 무고한 백성이 죽게 되는 것이 두려워 바람이 불지 말기를 빌었다. 그러나 열흘째 되는 날, 아침 잔잔한 바람이 밤이 되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강풍으로 돌변했다. 월군의 화공이시작되었다. 민가에서 시작된 작은 불이강풍을 타고 거대한 불바다를 이루더니 마침내 성 안으로 옮겨붙었다. 그야말로연옥을 방불케 하는 아비규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