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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을 위한 전쟁, 악티움(Actium) 해전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제국은 무(武)를중시하는 상무(尙武)의 나라였다. 그 때문인지 한 가지 큰 아쉬움이 있다. 로마는이상할 정도로 문학의 유산이 빈곤하다. 물론,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가 있고 키케로와 세네카의 수필 같은 빼어난 작품들이 있지만, 문학의 양적 초라함은 어쩔 수 없다.

문학뿐만 아니라, 로마는 동시대에 기록된사서(史書)도 풍요롭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당연히 독자들은 로마시대 이후에 발표된 역사서나 인물전들과 친숙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후대의 작가들에게 풍부한 배경 지식과 영감을 주었던 로마 시대에 발표된인물전이 있다. 바로 플루타르코스(Plout- archos: 46년-120년 추정)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다.

플루타르코스는 그리스에서 태어나, 플라톤 학파에서 공부를 마치고 로마로 건너갔다. 그는 그곳에서 철학을 강의하며 로마의 역사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고 공부했다. 특히, 플루타르코스는 로마에서 원로원 의원을 포함한 다양한 친구들을 사귀며 로마의 역서적 인물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말년에 델포이에서 성직자로 인생을 마친 그는, 훗날 역사가들로부터 "작품 속에 등장한 인물들의 개성과 인간성을 누구보다 섬세하고객관적으로 표현했다 "라는 평가를 받았다.

로마의 역사와 인물들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책이 한 권 더 있다.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Ed- ward Gibbon: 1737-1794)이 쓴 <로마 제국 쇠망사>다.

기번은 1764년 로마에서 고대 로마의 풍습과 제도를 연구하던 중 깊은 사색에 빠졌다. "지성에서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며 경제력에서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졌던 로마가 어떻게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번영을 누리고 오늘날까지 그 위대함이 바래지 않았는가?" 기번은 생각에서 깨어나 곧바로 로마의 쇠퇴와 멸망을 글로 써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 후, 기번은 12년에 걸쳐 온 힘을 다해<로마제국 쇠망사>를 썼다. 책이 출판되자학계는 "로마제국의 역사를 학문적으로개관(槪觀)한 역사서다"라는 평가를 하며놀라워했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는 에드워드 기번의 노고를 이렇게 칭송했다. "당신은 이 저서 하나로 유럽 문단의 최고봉에 섰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수많은 로마의이야기들은 대부분 위 두 저서의 내용에 살을 붙이고 각색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참고로, 필자의 이 칼럼도 두 작품을 읽고 많은 부분을 인용하며 쓴 글이다.

로마의 역사는 왕정(王政), 공화정(共和政) 그리고 제정(帝政)으로 나눌 수 있다. 그 변천사 과정 중, 공화정에서 제정으로이동하는 기간이 로마 역사에서 가장 다이나믹한 시기였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이저가 원로원의 승인 없이 루비콘 강을 건넌 BC 49년부터 옥타비아누스가 초대 황제로 즉위한 BC 27년까지 20여 년이라고 할 수 있다.

긴 내전(內戰)의 마지막 패권을 다툰 두실력자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였다. 정국이 두 사람의 경쟁 관계로 굳어지자 로마 시민들은 거의 모두가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적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이저와 함께 전쟁터에서 잔뼈가굵은 백전노장 안토니우스와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 같은 옥타비아누스는 비교 상대가 아니었다.

시이저와 함께 수많은 전장에서 탁월한 역량을 보이며 무훈을 쌓았지만, 끝내는빗나간 열정으로 자신을 파멸의 길로 몰아 갔던 용장 안토니우스의 삶을 따라가 보자.

안토니우스의 성장 과정에서 그의 아버지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친절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알려졌는데, 유난히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다. 친구가 급한 일로 찾아와 돈을 빌려다라고요구하자, 수중에 돈이 없었던 크레티쿠스가 아내 몰래 은 대접을 주며 팔아 쓰라고 했던 이야기는 유명하다.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안토니우스는 돈에 대한 개념이 없어 낭비가 심했다. 안토니우스가 젊은 시절 250 탈렌툼이라는 큰 빚을지게 되었는데, 이를 안 아버지가 그를 집에서 내쫓은 일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 이 자신의 결점을 닮은 것은 미웠던 모양이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며 허송세월하는 안토니우스는 영락없는 건달이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겉모습과는 달랐다. 그는 야심이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술 좋아하고 선심 잘 쓰는 그의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안토니우스는 언제가 그들과 큰일을 하겠다는 뜻을 품고 있었다.

시이저 휘하의 군인이 되었을 때, 드디어 그의 처세(處世)가 빛을 보게 된다. 안토니우스에게는 리더로서 독특한 장점이 하나 더 있었다. 그는 전쟁이 없을 때는 술과 미녀들에 들러싸여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도 전쟁이 시작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길가의 더러운 물을 마시며 부하들과 고락을함께하며 싸웠다.

안토니우스가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시이저가 루비콘 강을 건널 때부터였다. 당시 호민관이었던 그는 진영을탈출하여 전격적으로 시이저의 편에 합류 했다. 로마로 진격한 시이저는 절대 권력자가 되기 위한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폼페이우스와의 일전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스의테살리아 지방 파르살루스 평원에서 벌어졌던 그 싸움에서 시이저가 승리하는데 안토니우스는 큰 역할을 하며 정치적 위치를굳혔다.

기원전 44년 시이저가 암살되며 로마는 다시 격랑의 소용돌이로 빠져든다. 정변의한가운데 있던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 와 힘을 합쳐 암살을 일으켰던 브루투스를 포함한 공화정 수호파들을 제거했다. 그뒤두 사람은 로마를 실질적으로 양분하여, 서쪽은 옥타비아누스가 동방은 안토니우스가 관리했다. 그들은 대립과 화해를 거듭하며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로마를 이끌어 나갔다.

그 당시, 안토니우스의 부인은 민중 선동가클라디우스의 미망인 풀비아(Fulvia)였다. 그녀는 권력에 대한 욕심이 대단한 여자로 알려지고 있다. 다시 말해, 남편을 위해 헌신 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을 권력자로 만들어 그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 하는 여인이었다. 훗날,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클레오파트라에게 복종하는 안토니우스는풀비아에 의해 훈련되었다."

풀비아는 남편이 점령지에 있는 동안 로마에 머물며 잠재적 정적인 옥타비아누스를제거하기 위하여 분주하게 움직이었다. 그녀를 지원하는 정치인들과 몇 번에 걸쳐 군사를 일으켰으나 실패를 했다. 결국, 로마에서 위협을 느낀 그녀는 남편 안토니우스가 있는 동방으로 도주하게 된다. 풀비아는 남편을 만나지 못하고 여행길에서 죽었다.

그 후, 두 권력자는 화해를 해야 한다는 주위의 권고를 받아들인다.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누님 옥타비아(Octavia) 와 결혼하게 된 연유다. 옥타비아는 당시에 찾아보기 힘든 정숙하고 품위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풀비아와는 전혀 다른 성품으로 조용히 가정을 돌보았다.

그러나 옥타비아에게 반갑지 않은 소문이들리기 시작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염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로맨스 풍문은 로마를 휩쓸었다. 플루타코르스는 그의 저서 <플루타르코스영웅전>에 이렇게 썼다. "그녀는 안토니우스의 넋을 완전히 빼놓았다. 안토니우스의 단순한 성격과 내면에 숨어 있는 열정이 클레오파트라의 유혹을물리칠 수 없게 만들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시이저의 여인이었다. 그녀에게는 이미 카이사리온이라는 시이저의 아들이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리온을 로마의 후계자로내세우기를 원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카이사리온이야말로 시이저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선포한다. 순전히 클레오파트라의 정치적 야심을 채워주기 위한 선언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수도를알렉산드리아로 옮기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했다. 잠시 잠잠하던 로마의 정국은 다시 격랑으로 빠져들었다. 이제 두 진영의결전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을 설득하여 이집트에선전포고를 하고, 안토니우스에게 로마가부여했던 모든 권한을 회수했다.

싸움은 바다에서 결판을 내는 것으로 정리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해전에 대해 대부분의 안토니우스 휘하 장군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왜냐하면 옥타비아누스 군은시킬리아 해전에서 경험을 쌓았지만 안토니우스 측은 해전의 경험이 전무한 것이나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저서에서 안토니우스가 해전을 고집했던 것은 클레오파트라에게 자신의 화려한무용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썼다. 한백인대장은 안토니우스가 끝내 해전으로승부를 보려 하자 울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했다. "원수님, 어째서 이 상처들과 칼을 불신 하고 썩은 나무 널빤지에 희망을 거십니까?"

기원전 31년 9월 2일,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연합군과 아그리파가 지휘하는옥타비아누스 군이 그리스 서북부 이오니아 해 악티움에서 맞섰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내전의 최후승자를 가르는 이 전투를 마치 "아폴로와 디오니소스, 두 신들의 싸움을 방불케 했다"라고 기록하였다.

안토니우스 연합군은 전함 500척, 보병 10만, 기병 1만 2천이었으며 옥타비아누스 군은 전함 250척, 보병 8만, 기병 1만 2천이었다. 수적 전력에서는 안토니우스 군이앞섰지만 군의 사기나 병사들의 전투 능력에서는 옥타비아누스 군이 월등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한 것은 아그리파의 탁월한 전술과 지휘력이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안토니우스가 해전의 경험부족에도 불구하고 잘 버티며 아그리파에밀리지 않고 백중세를 보였다고 말하고 있다.

밀고 밀리던 치열한 전투 중에 돌발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갑자기 클레오파트라의전함 60척이 전선을 뚫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전투의 긴장감을 이기지 못한 클레오파트라가 펠로폰네소스반도 쪽으로 도망친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지켜보던 아군은 물론이었고, 적군인 옥타비아누스 군도 어이없어 했다.

그런데, 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를 따라 같이 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은 그런 안토니우스의 행동을 이렇게 기술 하고 있다. "전투 중에 여자의 꽁무니를 따라 도망친 안토니우스는 장부(丈夫)가 아니라는 것을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악티움 해전이 마지막 전투가 아니고, 다음 기회가 있을 것으로 판단 했다.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장에서, 자신을 위해 싸우며 죽어가는 전우를 배신하고 달아난 그를 누가 신뢰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결코비겁하고 약한 지도자를 따르지 않는다. 안토니우스 군은 옥타비아누스 군에게 먼저해군이 투항하고 뒤이어 기병대가 투항하며급속하게 무너졌다.

클레오파트라는 애당초 안토니우스와 운명을 같이 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그녀는 안토니우스를 이용하여 아들 카이사리온을 시이저의 후계자로 만들어, 로마의막후 권력자가 되고 싶었을 뿐이다. 안토니우스는 그런 분수를 모르는 여자에게 지조를 지킨다며 로마와 수많은 동료를 배신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오랜 세월 운명을 함께 하며 전장을 누볐던 동료들로부터 버림을받았다.

다행히 그의 마지막은 구차스럽지 않았다. 안토니우스는 패장(敗將)으로서 죽어야 할 때를 알았다. 그는 칼을 들어 자신의 배를 찌르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세상에서 최고의 명성과 권력을누리다가, 이제 로마인으로서 로마인에게패했으니 결코 수치스럽게 죽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