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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도(Lido)에서 만난 토마스 만(Thomas Mann)

리도섬을 찾아가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처음으로 한국인이운영하는 BNB에 묵게 되었다. 베네치아에 미술 공부하기 위해 왔다가 정착하게 되었다는 30대 여주인이 차려준 아침을 먹고 나오는 길이다. 한국식이라고 차려준 음식이 아무래도 이탈리아 음식과 뒤섞인 퓨전요리 같은 기분이 들었다.

봄날의 햇빛이 한낮이 되면 제법 따가울기세다. 산타루치아 역 근처의 페로비아(Ferrovia) 선착장에는 이른 아침인데도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리도 행 수상버스, 바포레토에 올랐다. 섬까지는 약 5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여행객들은 보통리도에 가기 위해서 이곳 산타루치아 역이나 산 마르코 광장에서 수상버스를 탄다.

배에서 바라보는 베네치아의 모습은 다른도시와는 확연히 다르다. 자동차가 전혀 없는 거리와 물 위의 집들은 말 그대로 수상도시의 풍경이다. 수로와 접해 있는 집들의 베란다 철제를 감고 있는 녹색 나팔꽃줄기와 빨간 꽃 화분들이 운치를 더해 준다. 20여 분 후에 산 마르코 종탑과 두칼레 궁전이 보였다. 그곳 선착장에 잠시 머문 수상버스는 곧 아드리아 해에 들어서며 목적지를 향해 속력을 낸다.

해마다 8,9월이 되면 리도섬으로 가는 수상 버스는 늘 만원이다. 베네치아 영화제가 본섬이 아니라 그곳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은 이 섬을 찾아가는 이유가 조금 별난 사람들도 있다. 소설 속에 그려진 외롭고 암울하기까지 한, 그러나 눈부시게 아름다운 해변의 모래벌을 걸어보고싶어서다. 리도는 작가 토마스 만의 작품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배경이다.

토마스 만은 1875년 독일 뤼베크에서 아버지 토마스 요한 하인리히와 어머니율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북독일적이성과 엄격한 도덕관은 아버지로부터, 예술적 재능은 남국의 포르투칼계 피가 섞인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토마스 만의 작품 중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소설은 장편 소설 <마의산>이다. <마의 산>은 괴테의 <빌헬름마이스터>와 함께 세계문학 교양 소설의 대표적 명작으로 우뚝 서 있는 작품이다.

소설 <마의 산>은 23세 청년 한스 카스트로프가 함부르크 조선소 취직이 확정된 후, 사촌을 만나기 위해 스위스 다보스에 있는폐결핵 요양원 베르크호프를 찾아가며 시작된다. 운명처럼 한스는 그곳에서 자신도 결핵 진단을 받고 7년이라는 긴 세월을베르크호프 요양원에서 지내게 된다. 소설은 주인공 한스가 그 요양원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겪는 이야기다.

작가 토마스 만은 학창 시절부터 써왔던일기를 거의 다 불태운 일이 있었다. 그가일기를 불태웠던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은폐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는 작품 속에서는애써 그의 성적 성향을 감추려 하지 않고탐미적으로 접근하여 창작의 힘으로 승화시키려 노력했다. 소설 <마의 산>에서 주인공 한스가 어린 시절 학우였던 프리비슬라프 히폐를 짝사랑하고, 요양원에서 남성적인 이미지를 보이는 러시아 여인 쇼샤를 사랑하는 것은 은근한 동성애적 묘사라고볼 수 있다.

<마의 산>에서 작가는 주인공 한스를 통해 언듯언듯 동성애적 감정을 묘사한 반면,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주인공 구스타프 아센바흐는 구차스러운 위선의 옷을 벗어 버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그는 내면의 동성애적 욕망을 억누르며 작가로 대성한 예술인이다.

소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은 뮌헨에서아센바흐의 틀에 박힌 일상을 이야기하며 시작된다. 집을 나와 산보를 하고, 돌아와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고, 다시 밖에 나와 신선한 공기를 들이켜며 걷는... 성공한예술인의 여유가 물씬 풍기는 모습이다. 그러나 소설은 곧바로 성공 뒤에 찾아온안락함과 타협한 작가의 현실안주와 이를거부하려는 자아(自我)와의 충돌의 고뇌를 그리고 있다.

"그의 예술 작품은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즐겁게 하고 고양시켜 주며 활기를 넣어 주었다. 그러나 명성을 얻었던 많은 작가들이 그랬듯이, 아센바흐도 나이가 들며 그의 문체는 거리낌 없이 대담하고, 미묘하고신선했던 음영(陰影)을 잃어버렸다. 그 대신 표준적이고 고정된 문체, 세련되고 전통적인 문체, 보존적이며 형식적이며 심지어상투적인 문체로 변해갔다."

이런 현상은 어쩌면 지금까지 쌓아왔던명예와 부에 안주하려는 인간의 본능적행위인지 모른다. 그러나 영혼이 있는 예술인은 그런 현실안주를 결코 받아들이지 못 한다. 그들은 다시 고뇌하고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

아센바흐는 그날 느닷없이 홀로 여행을 떠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그는 지금까지충동적인 삶을 살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정말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머릿속에는 벌써 매력적인 어느 관광지에서 낮잠을 자고 쉬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는 어쩌면 지금의 충동이 창작에 대한 지나친 압박 때문일 것이라 생각하며 자신을위로했다.

아센바흐는 처음부터 베네치아로 여행할 계획은 아니었다. 목적지에 대한 구체적인계획 없이 떠났던 여행길에, 그는 불현듯 베네치아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베네치아행 배에 오른 아센바흐는 여행목적지를 잘 선정했다는 혼잣말을 되뇐다. "그래, 베네치아는 찬란하게 빛나는 모습으로 나를 맞이해 주지...."

베네치아에 도착한 아센바흐는 선착장에서 리도섬으로 가는 소형 증기선으로 옮겨타기 위해 곤돌라를 불렀다. 소설은 색깔이특이할 정도로 까만, 물이 찰싹거리는 밤 바다에서 소리 없이 움직이는 곤돌라가 마치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장례식을 연상시킨다고 말하고 있다.

리도섬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얀 꽃들이피어있는 가로수길, 길 양쪽에 상점, 음식 점, 숙박업소가 늘어선 도로는 비스듬하게가로질러 해안 쪽으로 쭉 뻗어 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이국의 길은 쓸쓸하다. 그러나 작가는 그 외로움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고독은 우리 안에 있는 독창성을 무르익게 하고 대담하고 낯설게 하여아름다움과 시를 낳는다."

엑셀시오르 호텔에 여장을 푼 아센바흐는해변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가벼운 운동을 마치고 그는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1층에 있는 식당에 들어섰다. 그곳에는 한 무리의청소년들이 있었다. 열여섯에서 열여덟 살쯤으로 보이는 소녀 세 명과 열네 살 정도의소년이었다. 그는 소년의 외모가 완벽하게 아름다운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아센바흐와 폴란드 미소년 타치오가 처음 만나는순간이다.

그날 이후 아센바흐의 모든 감각은 소년에게 몰입되었다. 소년을 훔쳐보는 일이하루의 일상이 되었다. 소년이 호텔의 홀에 있을 때면 아센바흐는 신문을 무릎에올려놓고 넋이 나간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가끔 소년의 잿빛 눈과 마주치는 일도 있었고, 소녀들의 대화를 통해 소년의 이름이 타치오라는 것도 알게 된다.

아침해가 높아지면 세 명의 소녀와 소년은 늘 백사장 너머 바다에서 수영을 즐겼다. 그때가 되면 어김없이 아센바흐는 일광욕용 의자를 놓고 비스듬히 누워 소년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다. 그는 지금 한 인간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화 속의 신을 생각하며 예술가의 어떤 걸작을 감상하듯타치오를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혼잣말을 하며, "정말이지 나를 기다린 건 바다와 해변이 아니었어. 네가 여기 있는 동안 나도 여기에 있어야겠어." 그가 눈길을 먼 수평선으로 옮기자, 시선은 미끄러지고 몽롱해지며 의식은 황량한 바다의 단조로운 안개 속으로 흐릿하게 빠져든다.

리도섬에는 은빛 백사장과 따뜻한 태양이 있지만, 그러나 소설에는 드문드문 죽음을예고하는 듯한 어두운 문장들이 등장한다. 한밤중에 물 위에 떠있는 검은색 곤돌라, 타치오의 조각 같은 창백한 얼굴, 베네치아골목길의 짙은 포르말린 냄새는 불길한예감을 불러온다. 소설 속에는, 또, 이런 탐미적 문장도 있다. "까마귀들이 가문비나무의 우듬지 사이를 푸드덕거리며 날아다닌다."

베네치아는 이미 전염병 콜레라가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었다. 그런데, 당국은 경제적 타격 때문에 이 치명적 팬데믹을숨기고 있었다. 도시는 소독약 냄새가 점점짙어지고, 알 수 없는 음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다행히 아센바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인들이 서둘러 떠나는 것을 보고 상황을파악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 그는, 놀랍게도, 제일 먼저 타치오가 떠날지 모른다는걱정을 한다. 더 나아가,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자신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센바흐는 벌써 타치오를 생명처럼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대가(大家)이자 작위(爵位)를 받은예술가였다. 그는 타락을 물리치고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극복하며 대중의 존경을 받는 출세한 작가였다. 그 아센바흐가 지금 지친 육신을 이끌고 한 소년을 쫓아가며 베네치아 골목길을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미 콜레라에 감염되었다. 머리는지끈거렸고 참을 수 없는 갈증이 찾아왔다.

아센바흐의 생명이 꺼져가는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작가는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를소환한다. 그 파이드로스가 소크라테스의 대화 상대인지, 아니면 에로스인지 알 수 없지만 아센바흐는 소년 타치오를 파이드로스라 부른다. 그리고 그는 점점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며 이렇게 소년과세상에서의 이별의 말을 남긴다. "난 이제 떠나련다. 파이드로스여, 넌 이곳에 남으렴. 그리고 내 모습이 더 이상 안 보일 때 너도 떠나라."

초로의 저명한 작가가 여행지에서 만난미소년을 마지막 생명의 불꽃까지 태우며사랑한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은 일반적관념과 도덕의 기준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단(異端)의 주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이 작품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한마디 말도걸어보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소년을 바라만 보는 아센바흐에게 깊은 연민을 느낀다. 그것은, 아마, 소년 타치오를 성(性)의 한계를 넘어선 신화 속의 주인공으로 변신시킨 작가 토마스 만의 뛰어난 서정적 산문(散文)의 힘이 아닌가 싶다.

내가 리도섬을 방문했을 때도 봄이었다. 선착장에서 내려 영화제가 열리는 해변으로 가는 도로는 소설 속의 아센바흐가 걸었던 길이다. 또, 작가가 말한 가로수는그 길을 걸어보면 플라타너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로수 주위에는 빨간 양귀비꽃들이 탐스럽게 피어 여행객들을 반긴다.

경사진 도로는 해변으로 연결되어 있고, 입자가 고운 모래사장 너머에는 아드리아 해가 캘린더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영화제 시즌이 아닌데도 해변에는 하얀색천막들이 유난히 많다. 역시, 리도섬은축제의 고장임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다른 지역과 달리 리도는 해변과 접해 있는 호텔들이 백사장을 사유지로 관리하고 있는지 많은 펜스들이 설치되어 있다. 마치아센바흐가 묵었던 엑셀시오르 호텔처럼... 길을 걷다 붉은색 꽃과 흰색 테이블이 예뻐무심코 들어간 야외 식당에서 먹었던, 혀끝을 깜짝 놀라게 했던 음식 맛은 오랫동안리도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기다리던 벚꽃이 피자, 며칠 되지도 않아, 그새를 못 참고 비바람이 몰아쳐 떨어뜨리고 만다. 유행가 가사처럼 봄은, 또, 이렇게속절없이 지나가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올봄이 다 가기 전에 괴테, 바그너, 카프카와 함께 독일 예술의 전통을이었다는 평을 받고 있는, 현대 고전문학의거장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읽어 볼 것을 권한다.

김종호

•위 글은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홍성광 옮김/ 열린 책들, <마의 산>/홍성광 옮김/을유문화사에서 인용한 부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