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사회와 그 적(敵)들
피레아스는 아테네의 외항(外港)이다. 그리스 최대 항구로 고대 아테네의 주요무역은 이곳을 통해 이루어졌다. 페르시아 전쟁을 앞두고 개발되기 시작한 피레아스는,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를 이끈 아테네 해군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기원전 400년 경에 이 도시의 큰 부자게팔로스 맏아들 폴레마르코스의 집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였다. 모임은 유력한 집안의 젊은이들이 당시 이름난 학자 소크라테스를 모시고 대화를 나누기 위한 자리였다. 그들 중에는 플라톤과 그의 형 아데이만토스와 동생 글라우콘도 있었다. 대화 의 초기에 플라톤 형제 외에 다른 몇 사람이 등장하지만, 얼마 후에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두 형제가 주도적으로 대화를 이끌어 간다.
그때의 대화를 함께 참석했던 플라톤이정리한 책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국가 : Politecia>다. 전체 10권으로 이루어진 <국가>는 2권부터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대부분 플라톤의 형제 아데이만토스와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와 나눈 대화다. 따라서, <국가>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형제들과의 대화라고 해도 무방하다.
소크라테스는 책을 한 권도 쓰지 않았다. 반면에 그의 제자 플라톤은 많은 저서를남겼다. 주요 작품들은 <국가>, <법률>, <향연>, <파이돈>, <소크라테스의 변명>,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플라톤의 저서들이 딱딱한 논문 형식의 철학서로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의책들은 모두 소설에 가까운 평이한 산문으로 되어 있다.
플라톤의 <국가>는 영어로는 "The Rep- ublic"으로 번역되었고, 우리가 부르는"국가"는 일본에 의해 번역된 것을 그대로사용하고 있는 이름이다. 국내 학자들 중에는 이 책의 제목을 "정체(政體)"로 번역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국가> 의 내용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정의(正義)의 정의(定義)", 철인(哲人) 정치", "선(善)의 이데아(Idea)", 영혼의 불멸성"이다. 위 네 사상의 전체적인정치철학적 고찰은 다음 기회로 미루자.
플라톤은 국가를 형성하는 인적 구조를수호자, 전사, 생산자로 구분했다. 수호자는 정치인, 즉, 통치자 그룹이고 전사는군인이며 생산자는 일반 시민이다. 그런데, 플라톤이 이 수직적 계급을 바라보는 관점이 정말 놀랍다. 그는 <국가>의 5권에서 언급한 인적 구조를 지극히 국가주의와전체주의 성격의 틀에서 운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의 극단적 국가주의 사상이 독자들을 당황케 하는데, 심지어 이런 내용도 있다. "훌륭한 남자들은 훌륭한 여자와되도록 자주 성관계를 맺어야 하지만 열등한 남자들은 열등한 여자들과 되도록 드물게 성관계를 맺어야 한다. 가능한 한 가장 훌륭한 남자와 여자가 생겨나는 것보다국가에 더 좋은 일은 없다."
플라톤은 남녀의 짝을 고르는 제비뽑기를조작해서라도 열등한 사람들을 골라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전사가 수호자의 자리를 넘보지 못하게 하고, 생산자는 전사의 위치를 생각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플라톤은 인위적으로라도 머리 좋고 건강한 아이들을 낳아, 엘리트 집단을 만들어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이 <국가>를 썼던 시기는 아테네인들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패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였다. 그런 이유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플라톤이 승자인 스파르타의 집단주의적국가주의에 호의적이었을 것이라며 무겁지 않게 여기었다.
그러데, 20세기 들어서 오스트리아 출신런던대학 논리학 교수 칼 포퍼(Karl Pop- per: 1902-1994)가 플라톤의 국가주의사상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나섰다. 1945년에 발표한 그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 es>에서, 포퍼는 "플라톤은 위대한 개인주의자였던 스승 소크라테스를 배신했다"라며 플라톤을 맹비난했다.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플라톤은 젊은 시절 그의 삼촌 크리티아스를 가장존경하며 따랐다고 말했다. 크리티아스는펠로폰네소스 전쟁 패배 후 스파르타의영향 아래 자행되었던 아테네 공포 정치의주역이었다. 그는, 결국, 아테네 민주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청년 시절에 이런 격동의 현장을 목격하며 보냈던 플라톤은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조소와불신을 갖고 있었다.
서양사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체제, 즉, 엘리트주의를 추구했던 나라는 아테네와 함께 패권을 다투었던 스파르타였다. 그리고, 플라톤이 그리스에서 가장 우수한 정치 체제로 스파르타를 꼽았다는 칼 포퍼의 주장을, 플라톤의 <국가 >를 정독한 사람들은 동의할 수밖에 없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와의 전쟁에서 승리 했지만, 급격한 인구감소와 경직된 체제로 인해 스스로 무너졌다. 순혈주의를 고집 하고 다양성을 거부했던 엘리트 국가 스파르타는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오늘날 스파르타가 있던 펠로폰네소스 반도에는 아무런 문화유산도 없는 쓸쓸한 땅으로 남아 있다. 자유와 평등을추구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며 민주주의의 꽃을 피웠던 아테네가 인류에게 엄청난예술품과 건축물 그리고 무형의 유산을 남긴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사상을 극복하는과정이었다"라는 말이 있다. 2천 년 넘게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정치철학과 윤리학에 영향을 끼치며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 되고 있는 플라톤의 사상은 심오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흥미롭고 극적인 상황 설정, 생동감 있는 묘사 그리고 체계적인 해설로이루어진 플라톤의 글은, 그가 왜 그리스 최고의 산문 작가였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에서 보여 주고 있는 플라톤의 귀족주의적 정체인 국가 주의 옹호 사상은 충분히 비판받을만 하다. 칼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내가 비판 하고자 하는 것은 플라톤 정치 철학의 전체주의적 경향"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아테네 시민이었지만, 아테네의 자유와 평등 정신을 외면한 플라톤에 대해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는 <국가>의 독자들의 생각을 적절히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난 5월 1일, 대법원이 이재명 후보 2심무죄 판결을 깨고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 하며 나라가 다시 혼란을 겪고 있다. 무엇보다, 국민들은 대법원이 대통령선거를 한 달 정도 남겨 놓고, 이례적으로 무엇에 쫓기듯 판결을 서두르는 모습에 어리둥절해 했다.
국민의 50퍼센트 가까운 지지를 받고 있는 대통령 후보자를, 다툴 여지가 많은 죄목을 갖고 제거하겠다는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을 바라보며 시민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궁금하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괴상하고부담스럽게 생긴 의자에 앉아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귀족주의적 오만함을 보았을 것이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다. 그는 평생 쌓아왔던 자신의 커리어(Career)를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 위기를 스스로자초했다.
해외의 언론인과 지식인들이 한국의 정치를 거론할 때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전관예우"라는 판사 검사들의 해괴한 행태다. 이것은 한국의 정치 시스템 가운데법원과 검찰청이 가장 부패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시민사회는 사법구조와 인적구성을 예의주시하며, 개혁의 실마리를 찾아 과감하게 추진해야 한다.
지금, 대법원장과 몇 명의 판사 탄핵을 놓고 설왕설래하며 소란스럽다. 그러나, 개혁 시민 세력은 전선(戰線)의 확대를 두려워 말아야 한다. 조희대와 그에게 동조한 대법관들은 학연과 지연으로 엮여있는, 사라져야 할 법조계 엘리트주의자들의하수인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이나 국가나행운이 때로는 불행을 가장한 가면을 쓰고 찾아 온다. 대법원이 걸어온 이번 싸움이 어쩌면 사법 개혁의 불씨가 될 수 있고, 해방 이후 가장 견고하게 이어져온 사법카르텔을 깰 수 있는 단초(端初)가 될 수 있다.
한국 사회에는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 라는 특권 의식을 갖고 있는 여러 집단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상당히 많은 판사 검사들과, 그 출신 변호사 그룹들이 집단 엘리트 의식을 갖고 시민 위에 군림하려 한다. 일제와 독재의 시대를 거치며독초처럼 뿌리내린 부끄러운 우리의 초상(肖像)이기도 하다. 열린사회와 민주주의적(敵)인 이런 시대착오적 귀족주의, 엘리트주의를 청산하지 못한다면, 단언컨대, 대한민국은 선진 민주국가로 갈 수 없다.
김종호
•위 글은 플라톤 저 천병희 옮김의 <국가> 와 칼 포퍼 저 이한구 옮김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인용한 부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