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속의 연인 오드리 헵번 (Audrey Hepburn)
이제 노년의 시대를 앞두고 있는 지금의60대나 70대 사람들에게, 젊은 시절은마땅히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오락이 많지 않았다. 당시, 그나마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화 소비품 중 하나가 극장의영화였다. 남학생들에게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서부 영화가 상영될 때면 결투흉내가 심심풀이였고, 이소룡 영화가 개봉 되면 쌍절곤 휘두르며 내는 독특한 기합 소리가 유행이었다.
그렇지만, 그 시대에도 소년들을 열광시켰던 스크린이 꼭 서부극이나 무술영화만은 아니었다. 비극이나 로맨틱 코미디장르도 적지 않았다. 당연히, 예쁘고 귀여운 영화의 여주인공은 푸릇해지는 청춘들의 마음을 훔쳤다. 누가 더 예쁘냐며 가벼운 입씨름도 하고, 하숙집 방 벽을 좋아하는 여배우의 사진들로 장식해 놓기도 했다. 오드리 헵번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지방시 검은 드레스와 다소 과장스러운진주 목걸이 그리고 얼굴을 반쯤 가린 선글라스를 쓴 한 여인이 이른 아침 택시에서내린다. 뉴욕 5번가에 있는 티파니 보석상앞이다. 쇼윈도 안쪽을 들여다보며 커피와 크루아상을 먹는 오드리 헵번.... 영화<티파니에서 아침을: Breakfast at Tiffa- ny's>의 오프닝 장면이다. 원래 문방구자리였던 티파니 보석상은 그렇게 한순간에 뉴욕의 유명 여행 데스티네이션이 되었다.
영화가 크게 흥행하며 원작이 빛을 잃는 경우가 헐리우드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다. <티파니에서 아침을>도 그런 작품이다. 이 영화는 20세기 미국 문단에서 성공한 작가 중 한 명인 투르만 카포티(Truman Capote)의 동명 소설을 각색(脚色)한 작품이다. 작가 카포티는 제작진으로부터이 소설을 영화화 하고 싶다는 연락을받았을 때, 주인공 "홀리 골라이틀리(Holly Golightly)" 역을 마릴린 먼로가 맡아 주기를 원했다고 한다. 사실, 원작의 주인공 홀리는 부유한 남자를 만나 큰돈을 벌어보려는 고급 매춘부로 청순한 이미지의 헵번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는, 불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에 의해 주인공 홀리의직업을 전문 파티어(Partier)로 변신시켜, 원작 소설보다 순화시키며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이 발표되기 8년 전, 1953년에 신인 배우 오드리 헵번을 일약"세기의 연인"으로 만들어준 영화가 <로마의 휴일: Roman Holiday>이다. 그러니까, 그녀가 뉴욕 5번가 티파니 보석상을 유명한 관광지로 만들기 훨씬 전에, 로마에 이미 세계적인 여행 목적지를 만든 것이다. 바로 "스페인 계단(Piazza di Spagna: 피아짜디 스파냐)"이다. 이곳은 17세기 근처에 스페인 대사관이 있던 자리라 그런 이름이붙여졌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화류계 여인이었던 헵번은, 그녀의 데뷔작 <로마의 휴일>에서는 전혀 다른 계층의역인 공주를 연기했다.
정말 흥미로운 것은, <로마의 휴일>도 처음 출연 내정자가 헵번이 아니라 엘리자베스 테일러였다고 한다. 그러나, 자금에쪼들리던 제작사가 이미 대 배우가 된 리즈 보다 출연료 부담이 적은 신인 여배우 오드리 헵번을 캐스팅 한 것이다. 또, <로마의휴일>은 제작비를 아끼려고 흑백 영화로 만들어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영화는 숨 막힐 정도로 꽉 짜인 스케줄로진이 다 빠진 앤 공주가 잠을 못 이루고 침대에서 괴로워하며 시작한다. 시의(侍醫) 가 준 수면제까지 먹고 잠을 청하지만, 결국, 그녀는 발작적으로 대사관을 뛰쳐나온다. 공주는 모든 스트레스에서 해방된 듯 로마의 거리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녔다. 그렇게 정신없이 쏘다니던 그녀는, 약기운이 점점 퍼지며 길가에 쓰러져 잠들어 버린다.
관객들은 영화속의 앤이 어느 나라 공주인지 궁금해 하기도 했다. 영국 왕실과 친숙한 이름이라, 영국 공주일 것으로 짐작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영화에는공주의 나라를 알려주는 대사나 장면은 없다. 그녀는 세계적 유명 인사로 언론의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있는 공주로만 묘사 되고 있다. 그런 앤 공주의 활동을 취재 하기 위해 수많은 기자들이 대사관 주위에몰려있었다.
배우 그레고리 팩이 열연한, 영화 속 아메리카 뉴스 서비스의 "조 브래들리" 기자도 로마에서 특종을 찾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길을 지나다 우연히 길가에 잠들어 있는 한 아가씨를 발견하고,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숙소로 데려와 하룻밤을재워 주게 된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준비하던 조는, 조간신문에 실린 사진 속 앤 공주와 자기 방에서 아직 자고 있는 여인이 동일인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란다.
특종이 제 발로 들어왔다고 생각한 조는 부랴부랴 사진사 친구를 불렀다. 그리고, 잠에서 깬 후 헤어진 앤 공주를 몰래 추적 하며 기사를 준비한다. 그녀를 따라다니던 조는, 앤 공주가 스페인 계단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을 때, 우연을 가장해 그녀와 재회를 하게 된다. 두 사람은, 그 후, 로마의 관광지 이곳저곳을 함께 다니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에피소드 속에서 앤 공주와 조는 서로 가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둘은 그들의 사랑이 맺어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며, 자신들 본래의자리로 돌아가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오드리 헵번이 <로마의 휴일 >과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연기한 역이 완벽하게다르지만, 관객들은 두 영화를 보며 공통적으로 느꼈던 감정이 있다. 여배우 헵번의귀엽고 예쁘고 청순한 이미지다. 그리고, 데일리 텔레그레프(Daily Telegraph)의평론에서 영화 속 그녀에 대해 표현한"퍼플렉서(Perplexer)"다. 때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에서 튀어나오는, "무슨 일을 할지 갈피를 못 잡게 하는 그녀의 행동"이귀여움과 웃음을 더해준다.
<로마의 휴일>에서 앤 공주와 조가 함께 다녔던 관광지는 스페인 계단 말고도 많다. 콜로세움, 천사의 성, 진실의 입, 트레비 분 수, 티베르 강 등과 같은 곳이다. 그런데 이 스페인 계단이 마치 오드리 헵번을 기리는성지처럼 된 것은, 순전히 그 영화를 사랑했던 팬들의 발길 때문이었다. 137개의계단으로 이루어진 스페인 계단은 지하철A선 '피아짜 디 스파냐(Piazza di Spag na) 역'에서 내리면 1분 거리 내에 있다.
스페인 계단이 있는 스페인 광장은, 사실, <로마의 휴일>이 개봉되기 오래전부터 유럽의 문화예술인들이 즐겨 찾던 명소 였다. 괴테가 로마에 있을 때 머물던 곳도 이주변이다. 그뿐만아니라 바이런, 스탕달, 발자크, 안데르센, 바그너, 니체 같은 거장들이 이곳에서 산책을 하고 휴식을 취했다.
"안티코 카페 그레코"는 개인적으로 로마에 갈 때마다, 가능하면, 꼭 들러 보는 곳이다. 스페인 계단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콘도티 거리(Via Condotti)에는 프라다, 에르메스, 페라가모 같은 명풍 숍들이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카페 그레코도 그곳에 있다. 그리스 풍의 클래식한 카페는 격조 있는 분위기를 보여 준다. 1760년 문을 연 이 카페에서 위에 언급한 저명한 예술계의명사들이 담소를 즐기고, 때로는 문학과 예술 그리고 정치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이며 지적 힘을 키우고 영감을 얻었다.
카페 그레코 앞에서 위쪽 스페인 계단을 바라보고 있으면 묘한 기분이 든다. 끝없이몰려오는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는 스페인계단에 비해 카페 그레코는 한적하고 차분 하다. 마치, 배우 오드리 헵번이 시대의지성을 대표했던 거장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대중예술의 막강한 힘과 영향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만든다.
대한민국은 이미 대중예술 문화 강국이 되었다. 우리 드라마가 세계적 OTT 서비스차트 상위권에 포진하고 있는 것이 이상 하지 않고, 서구권 도시의 광장에서 K-pop공연이 낯설지 않다. 많은 문화 평론가들이 한류는 일시적인 현상일 것으로 예측했었지만, 케이컬처는 이제 세계 속에 뿌리를 더 단단히 내리며 음식, 뷰티, 헬스 등 다양한 분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한국의 대중문화는 새로운 진화를 준비하고 있다. 케이컬처는 지난 100년 동안 세계 대중문화를 지배해 왔던 서구 소프트파워의 강력한 적수로 떠오르고 있다. 문화계 종사자들과 관련 기관, 그리고 시민들이 힘을 모아 노력한다면, 분명히, 한국대중문화는 다시 한번 놀라운 도약을 이루어 낼 것이다.
우리의 다음 지도자는, 그의 앞에 도전 해야 할 많은 어젠다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문화의 파워를 이해하고 고양시키는데혼신의 힘을 쏟을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낡아빠진 이데올로기(Ideolo- gy) 싸움을 청산하고, 전략적 통찰을 갖고 미래의 문을 활짝 열어 가는 리더가 필요하다. 그래서, 개인의 자유가 확장되고 창의성이 극대화되어 대한민국이 초우량 국가, 진정한 선진 문화강국으로 세계 속에 우뚝서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