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고향 테바이 (Thebai) [4]
오이디푸스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안티고네>의 배경은 다시 테바이로 옮겨온다. 아버지를 콜로노스 성소원림에 보내드리고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안티고네는 오빠들의 전쟁을 말려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오빠 폴리네이케스는 아르고스에서 규합한 동료들과, 7인의전사를 구성해 테바이 침공을 강행했다. 이 싸움은 그리스 비극 문학의 또 다른 소재가 되었다.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중 한 명인 아이스퀼로스(Aischylos)의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 Hepta epi Thebas> 가 그 작품이다.
테바이는 아르고스 전사들의 공격을 물리쳤지만, 아버지 오이디푸스의 예언대로, 두 아들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가결투를 벌이다 서로를 찔러, 두 사람이한날한시 같이 죽는 참혹한 일이 일어났다.
테바이의 권력 투쟁이 언뜻 보면 형제간의싸움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 보면 그렇지 않다. 오이디푸스가 장님이 되어 테바이를 떠난 후, 왕위를 이어가야할 두 왕자 사이에서 크레온이 에테오클레스 편에 서서 형 폴리네이케스를 몰아낸 것이다. 에테오클레스는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배경과 능력이 없었다. 그러니 테바이의 실질적인 왕은 크레온이었던 셈이다.
오이디푸스의 외삼촌이며 처남이기도 한 크레온은, 그동안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 교활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선대왕들의 지근에서 충실하게 일하는 것처럼보였지만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가 떠난 후부터 죽 권력 기반을 다져오던 가운데, 오이디푸스의 두아들마저 죽었으니 이제 그는 합법적이며 완벽한 왕이 된 것이다.
크레온은 아르고스와 전쟁이 끝난 후,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장례에 대해 엄격하게 차별했다. 동생 에테오클레스는 나라를 위해 생명을 바친 가장 훌륭한 전사로 헌사 하며 그에 걸맞은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러나 형 폴리네이케스는 조국 땅을 짓밟고 친족의 피를 마시려 했다는 죄를 물어, 그 시신을 길거리에서 개와 새들에게 찢기게 하라고 명령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는 안티고네가 동생 이스메네에게,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흙으로 덮어주고 제주(祭酒)를 부어주겠다는 말을 하며 시작된다. 이스메네는 왕명을 어기려는 언니를 말려보려 했지만 안티고네의 의지는 확고했다.
안티고네는 행동하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기어코 오빠의 시신을 흙으로 덮어주고, 꿀탄 우유, 포도주와 물로 준비한 제주를붓고 명복을 빌었다. 당연히 왕명을 어긴안티고네는 크레온의 엄명에 따라 병사들에게 붙들려 왔다.
크레온에게 안티고네는 몇 안 되는 인척이며, 하나밖에 없는 아들 하이몬의 약혼녀이기도 했다. 그러나 크레온은 무엇보다 새로운 왕으로서 권위를 보여주고 싶었다. 어쩌면 크레온은 이번 사건을 왕권을 강화 하는 기회로 이용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비극 <안티고네>에서 법과 인륜을 놓고, 안티고네와 크레온이 벌이는 논쟁은 고대희곡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뛰어난 장면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보자.
크레온: 너는 왜 감히 포고령을 어겼느냐?
안티고네: 한낱 인간에 불과한 그대의 포고령이 신들의 변함없는 불문율(不文律)들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고 생각지 않아요.
두 사람의 대화에 코로스장이 끼어든다.
코로스장: 이 소녀는 성미 급한 아버지의딸임을 보여주는구려.
크레온: 잘 들어라. 지나치게 완고한 마음이 가장 쉽게 꺾인다는 것을. 너는 비록 내 누이의 딸이고, 누구보다 가까운 친척이지만 극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안티고네: 친오빠를 묻어주는 것만큼 큰영광이 어디 있겠어요?
크레온: 테바이 인들 중 너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안티고네: 그대 앞에서 공포가 입을 열지 못하게 하고 있지만, 그들도 다 나와 같은 생각하고 있어요.
옆에 있던 이스메네가 "친아들의 약혼녀를 죽일 것이냐"라며 울며 말렸지만 크레온은요지부동이었다. 그는 이미 안티고네를 처 형 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소식을 들은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이 급하게 들어온다. 그는 아버지의 무모한 결정을 막아 보려 온 힘을 다 쏟았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버지의 책망뿐이었다. 결국 부자간의 대화는 감정싸움으로 번지고 만다.
크레온: 내 아들아, 너는 향락에 끌려 한 여인 때문에 이성을 잃어서는 안된 다. 나는 그녀를 처형할 것이다. 자기 가정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도시를 다스리겠느냐? 우리는 법질서를 옹호 해야 한다.
하이몬: 아버지 신들께서는 우리에게 이성을 심어 주시는데, 이성은 인간이 가진 것 중에 최고의 재산이지요. 현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많은 것을 배우고 때로는 양보할 줄 아는 것은 수치가 아니에요. 하오니 노여움을 푸시고 생각을 바꿔보세요.
크레온: 못난 녀석! 한낱 계집에게 굴복하다니! 정신 나간 주제에 감히 나를가르치려 하다니. 후회하게 될 것이다.
하이몬: 제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저도 아버지를 정신 나간 분이라 했을 거예요.
크레온: 너는 나를 조롱한 것을 후회하게될 것이다. (하인들에게) 안티고네를 당장 끌고 와라. 그녀를 사람의발길이 닿지 않는 석굴에 가두고죄받지 않을 만큼의 음식만 넣어주어라.
크레온은 경호병들에게 안티고네를 석굴에 생매장하고 최소한의 음식만 넣어 주게 했다. 이는 그녀의 죽음이 자연사가 되어 그녀를 죽인 사람들이 죄받지 않게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크레온과 아들 하이몬의대화가 파국으로 끝나자, 코로스는 열병(熱病) 같은 사랑에 대해 노래한다.
"사랑이여, 싸움에 지지 않는 자여, 사랑이여, 집안을 결딴내는 자여, 하루살이 인간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너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며, 네게 잡힌 자는 미쳐 날뛰는구나. 위대한 법규들과 나란히 지배하는 힘이 승리를 거두니, 이는 불패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유희하고 있음이라."
큰 소란이 지나가고 잠시 정적이 흐르고 있을 때,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소년에게 인도되어 궁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크레온은 그동안 테이레시아스의 점괘를누구의 말보다 신뢰하고 따랐다. 그러나, 최고 권력자 왕이 되자, 테이레시아스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예전과 달리 교만함이 엿보였다. 테이레시아스는 왕이 지금 잘못된 결정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You stand once more on the edge of fate. 왕이여, 그대는 다시 한번 운명의 칼날 위에 서 있소."
크레온은 "난데없이 무슨 황당한 소리냐"라는 듯 테이레시아스의 말을 받아넘겼다. 테이레시아스는 다시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소. 하지만 실수를 하더라도 그 실수를 고칠 줄 알고고집을 부리지 않는 자는 더 이상 어리석은 자가 아니오."
속히 고집을 꺾고 안티고네를 구하라는테이레시아스의 진심 어린 충고였다. 권력자가 되면 대개 의심이 많아지고, 사안을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려 한다. 크레온도 그런 도그마(Dogma)에 빠졌다. 그는 테이레시아스가 누군가에게 매수되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으로 보고 있었다. 한참을 언쟁을 하다, 결국, 크레온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버린다.
"The generation of prophets has always loved gold. 예로부터 예언자들은 언제나 돈을 너무밝히지요."
테이레시아스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소년에게 인도되어 왕실을 떠나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집에 머지않아 남자들과 여자들의울음소리가 일어날 것이오."
테이레시아스가 떠난 후 코로스장이 무거운 침묵을 깨며 말했다.
"왕이시여, 저분이 무서운 이야기를 하고가버리는 군요. 제가 알기로는 저분은 머리가 희여진 후부터 한번도 거짖을 말한 적이없소이다."
갑자기 크레온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필연(必然)에 대항하며 무모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한번 불길한 예감이 들어오자 두려움이 그의 정신을 어지럽혔다. 그는 안티고네를 자기 손으로 손수 풀어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바꾼다. 그리고 하인들에게 서둘러 안티고네가 갇혀 있는 곳으로 가자고 재촉했다.
왕의 일행이 문이 열려있는 석굴에 도착 했다. 아- 그런데 굴 안에 보이는 모습은 이 무슨 참담한 광경인가. 그곳에는 하이몬이 죽은 안티고네를 안고 울고 있었다. 그녀는 크레온의 계획대로 굶어 죽기보다는, 리넨으로 끈을 만들어 스스로 자결하는 길을선택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옳다고판단하면 지체 없이 행동했던 오이디푸스의 비운의 딸 안티고네는 그렇게 죽었다.
크레온이 놀라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들어오자, 하이몬이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칼을 들이댔다. 크레온은 아들의 칼을 피했다. 그러자 하이몬은 그 칼을 자신의 옆구리에 밀어 넣었다. 그는 안티고네의 얼굴에 피를 쏟으며 죽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들로 넋이 나간 크레온이 신음하듯 탄식한다.
"아아, 분별없는 생각의가혹하고도 치명적인 실수여! 그대들은 보시구려, 한핏줄에서 나온 살해자와 피살자를!"
불행은 아들의 죽음에서 끝나지 않았다. 아들의 죽음 소식을 들은 크레온의 부인에우뤼디케가 자결을 한 것이다. 두 아들 중 한 명인 메가레우스를 아르고스와의 전쟁으로 잃고, 하나 남은 아들 하이몬마저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왕실의 제단 앞에서 예리한 칼로 스스로 자신의 배를 찔렀다.
이 비통한 현장을 목격하고, 비보를 알리는 사자의 이야기가 독자들을 깊은 상념에 빠지게 한다.
"우리는 크레온님이 부러웠습니다. 나라를 적들에게서 구하고, 무제한의 통치권을 얻은 왕이 되었지요. 그러나 이제 그분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한 인간이 사는 낙을 잃으면,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하신다면 집에 큰 재물을 쌓아두고화려하게 살아보라 하시지요. 하지만 그곳에 무슨 낙이 있겠어요."
그렇다. 인간은 이 땅에서 아무리 큰재물과 권력을 얻는다 해도 그것을 함께 나눌 사람을 잃어버리면 모든 낙은 사라진다. 찬바람이 부는 휑뎅그렁한 테바이의 궁전에는 정신줄을 놓은 듯한 크레온의울음소리만 쓸쓸하게 들려오고 있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다오, 이 못난 인간을! 내가 너를 죽였구나, 내 아들아, 그리고 당신마저! 이제 나는 어디로 시선을 돌리고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입구를 지나 파르테논 신전을 향해 길을 오르다 보면 오른 쪽 언덕에 고대 야외 극장 유적지가 눈에 띈다. 디오니소스 극장(Theatre of Dionysus)이다. 2500여년 전 이곳에서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도 초연(初演)되었다.
파르테논을 향해 바삐 걸어가는 많은 사람들은 이곳에 머물지 않는다. 그러나 비극을 좋아하는 여행객들은 디오니소스 극장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유적지 이곳저곳을살피고 있는 자도 있고, 돌계단으로 만들어진 극장의 관람석에 앉아 생각에 잠긴 사람도 보인다.
그리스 비극을 읽는 독자들은 "왜 그토록 고대 그리스인들은 비극을 사랑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을 것이다.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시학>에서카타르시스(Catharsis)를 언급하기도 했지만,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애매하게넘어갔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 있다. 인간의 삶은 그때나 지금이나 고달프고 실수하며살아가기는 마찬가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한때 위대한 왕과 영웅들도 어리석은행동으로 파멸에 빠져드는 모습을 보며, 잘못하고 실패하며 살아 가는 자신들을 위로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그 비극을 통해서, 살아가야 할 날들을 위한 삶의 지혜를얻으려 노력했다.
비극 <안티고네>가 막을 내릴 때 들려오는 코로스의 그리스어 노래를, 영문 번역 가 로버트 피츠제럴드는 이렇게 옮겼다.
"There is no happiness where there is no wisdom; No wisdom but in submission to the gods. Big words are always punished, And proud men in old age learn to be wise. 지혜가 없는 곳에 행복은 없다네지혜 있는 자는 신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네. 오만한 자들의 큰 소리가 늘 벌을 받는 것을 보며, 우리는 늘그막에 지혜를 배우게 된다네."
-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3부작"을 모두 마칩니다.
김종호
•사진 설명: 아테네 디오니소스 극장 전경, 팬데믹 전 배낭여행 중 찍었습니다.
•위 글은 아래 책에서 인용하거나 참조한 부분이 있다. - <그리스 로마 신화> 이윤기 저-<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소포클레스/ 천병희 옮김-<Sophocles> Robert Fitzgerald -<역사철학 강의> 헤겔/ 권기철 옮김-<수사학/시학> 아리스토텔레스/천병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