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偶像)의 파괴
인류사 최초 아시아와 유럽의 전쟁이었던 페르시아 전쟁은 1차와 2차로 나뉜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의 침공을 1차라 부르고, 그 후 10년 후인 기원전 480년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의 대 원정을 2차 페르시아 전쟁이라 한다.
마라톤 전투에서 스파르타의 육군에 패하고 퇴각한 1차 전쟁에 비해, 2차 크세르크세스 페르시아 원정군 규모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컸다. 크세르크세스는 아버지 다리우스의 유업을 이어 6년 동안 국력을총동원해 전쟁을 준비했다.
페르시아의 육군은 지원인력을 포함한인원이 470만 명에 이르렀고, 해군은 1천여 척의 전함으로 이루어졌다. 엄청난 규모의 원정군 앞의 그리스 폴리스 연합군은 마치 풍전등화와 같았다.
헤로도토스의 <역사:HISTORIES APO- DEXIS>는 이 전쟁의 주역인 페르시아의 건국과 성장, 그리고 이에 맞선 그리스 폴리스 국가들의 지혜와 용기를 기록한저서다. <역사>에는 시대를 이끌었던 많은지도자들이 등장한다. 그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 아테네의 정치인이자 군인이었던테미스토클레스다.
스파르타를 포함한 거의 모든 폴리스들이 육군 중심의 국가를 운영하고 있을 때,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가 팽창하는페르시아와 맞서고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해군 중심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가 지도층의 인사들을 끈질기게 찾아다니며 설득하여 지지를 얻어냈다. 그리고 전함을 건조하고 군인 들을 훈련 시켰다.
기원전 480년 9월, 페르시아의 전함 천여척이 거침없이 그리스를 향해 진격해 왔다. 그리스 연합군 장교들은 전투 장소에 대해 두 곳을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코린토스의 넓은 앞바다와 살라미스 해협이었다. 다수의 지휘관들은 코린토스 앞바다에서싸우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명장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의 좁은 해협으로 적을유인해 결전을 치르기로 결정하게 된다.
그의 전략은 적중했다. "겁을 먹고 도망친다"라는 조작된 소문을 믿고 살라미스해협으로 밀고 들어온 페르시아 전함들은 갑작스러운 아테네 해군의 대 반격에 아수라장의 혼란에 빠지고 만다. 결국 아테네 해군은 기적 같은 승리를 쟁취했고, 페르시아 해군은 재기 불능 상태의 패배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자신의 정복 사업은 이미 완성했다고 생각하며, 그리스 해안 아이갈레오스에서느긋하게 해전을 관람하던 크세르크세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그는 이미 아테네까지 진격한 육군에게 속히 본국으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끈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뿐만 아니라 전 폴리스 국가들의 영웅이 되었다. 당연히 그는 아테네의 명실상부한 실력자가 되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10년 후, 아테네에서는 참으로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아고라 민회(民會: Ekklesia)가 테미스토클레스에게 도편추방(Ostracise)을 결정한 것이다. 그의 전 재산을 몰수하고, 10년 동안 아테네를 떠나라는 시민의 명령이었다.
그리스의 역사학자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저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테미스토클레스 도편 추방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의 권세가 압도적이어서민주주의 평등과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겨질 경우 아테네 시민들이 의례 행하던 일이었다."
아테네에서 추방된 테미스토클레스의 삶은 외로움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스파르타를 시작으로 이곳저곳을 떠돌다 나중에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적국이었던 페르시아 왕에게 몸을 의탁하기에 이른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끝내 아테네로 돌아가지 못하고 페르시아에서 숨을 거두었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의 생애를 살펴보면, "위대한 인물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경험하며 만들어진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명문 귀족가문에서 태어났지만, 학창시절 열등생으로 주위로부터 놀림을 받으며 성장했다.
처칠은 학업성적이 불량했을 뿐만 아니라행실도 전혀 귀족스럽지 못하고 제멋대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죽하면 그의 할머니마저 "처칠같이 막돼먹은 놈한테는 절대작위(爵位)를 물려줄 수 없다"라는 말을했겠는가.
처칠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한 시기는, 겨우 턱걸이로 입학한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 시절이었다. 그는 보병 병과를선택하라는 가족과 주위의 권유를 무시하고 기병을 선택했다. 그가 기병을 선택한 것은 순전히 수학을 하기 싫어서였다. 놀면서 어영부영 졸업장이나 따겠다는심산이었다.
그런데 기병을 공부하던 처칠은, 그 답지 않게 갑자기 학업에 큰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이상하리만치 열심히 공부하는 그를 보며 주변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어쨌든 만년 열등생 처칠은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졸업했다.
졸업 후 처칠은 인도, 스페인, 쿠바 등의 전투에 참여하며 실전 경험을 쌓았다. 영국인들에게 윈스턴 처칠이라는 이름이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가 제대 후 보어전쟁(Boer-Wars)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종군기자이며 장교로 전쟁에 뛰어든 그가, 적의 포로가 되었다 탈출한 사건이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된 것이다.
보수당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2차 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별다른 능력을 보여 주지 못하는 그렇고 그런 정치인이었다. 오히려, 타협을 모르며 광적으로 전쟁을 좋아하는 독불장군이라는 평판이 우세했다. 그러나 소문난 열등생에서 어느 순간 뛰어난 사관생도가 되었듯이, 처칠은 전쟁과 함께 탁월한 정치력을 보이며 유력한정치인으로 우뚝 서게 된다.
포탄이 떨어지는 런던의 지하벙커에서시가를 물고 전쟁을 지휘하는 그의 의연한 모습은 전쟁으로 실의에 빠져 있던 세계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결국, 그는 초기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끈 주역 중의주역이 되었다.
필자는 오래전에 윈스턴 처칠에 관한 영문 칼럼을 읽은 일이 있다. 칼럼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중들은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을싫어한다"라는 내용이었다. 고대 그리스철학자들의 "대중은 변덕스럽고 냉혹하다"라는 말과 뜻을 같이한다.
겉모습과 달리 처칠은 섬세한 성격의소유자였다. 그는 문학을 꿈꾸던 청년이었고, 실제로, 1953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처칠이 문장 속의 전치사 위치를 놓고 기자들과 논쟁을 벌였던 이야기는 꽤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1945년 7월 영국 총선은 영국뿐만 아니라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보수당이 패배하며 처칠은 수상에서물러나야 했다. 칼럼니스트는 총선의 결과를 이렇게 표현했다. 영국인들은 수상 처칠에게 "전쟁은 끝났으니, 이제 그만 내려오라"라고 명령했다. 칼럼은, 비록, 처칠이그 후 1951년 총선 승리로 다시 수상직에 올라 5년 동안 역임했지만, 그때의 충격은 참으로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요즘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의 합당 문제를 놓고 정치권이 상당히 시끄럽다. 새로운권력이 탄생하면, 늘 그렇듯이, 민주당도파벌을 형성하며 힘겨루기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심각한 내홍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이번 논란을 지켜보고 있으면, 특별히 세 사람이 눈에 띈다. 유시민, 김어준 그리고정창래다. 이들과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세 사람이 "합당을 통해 실패한 친 문재인 세력의 부활을 노리고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 당 대표인 정창래는 새 정부 축제의장과 같았던 주가 5000 달성의 날에, 조국혁신당에 합당을 제안하며 주식시장의낭보(朗報)를 제압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참으로 멍청하고 이해하기 힘든 그의 행동은 대통령과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논란이 과열되며 정상을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세 사람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거칠고 감정적으로 발전하는양상이다. 그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세 사람이 윤석열 내란으로 인해 많은 시민들이 심리적 어려움에 빠져있을 때, 전면에서싸웠던 노고를 무시하고 무차별적으로비난하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세 사람이 잊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시민을 가르치려는교조적(敎條的) 우상을 흉내 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보여 주었던 격정이 자신이 나 진영의 이익을 위해서였다는 의심을 받게 되면, 민심은 순식간에 등을 돌릴 것이다. 승리의 뒤에 리더들이 오만해지거나전리품을 챙기려 들면, 시민들은 냉혹하게 집단 "아이카너클레스트(Iconoclast: 우상 파괴자)"로 돌변한다. 그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알려준 불변의 교훈이다.
지금은 대통령 이재명의 시간이다. 그는 정부를 개혁하고, 금융시장을 투명하게 하며, 투기판이 된 망국적 부동산 시장을 바로 잡으려 온 힘을 쏟고 있다. 그리고절대다수 국민들이 그의 정책 방향이 옳다고 판단하며 지지하고 있다. 따라서 개혁적 시민들은 사사로운 감정을 내려놓고 대통령 이재명이 가는 길을 차분히 지켜보며 응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