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코트를 입은 마돈나 [1]
오랜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것은 힘이 되고, 즐거움을 준다. 그런데 종종 나이 들어 우연히 만난 낯선 사람과, 말이 통하고 서로 마음을 열며 백년지기처럼 빠르게가까워지는 경우도 있다.
사바하틴 알리(Sabahatin Ali: 1907-19 48)의 <모피코트를 입은 마돈나: Madon- na in a fur coat)도 그런 작품이다. 늦게 만난, 누구보다 예술적인 감성을 갖고 기구한 삶을 살았던, 어느 친구의 짧은 인생의 이야기다.
작가 사바하틴 알리는 터키의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불가리아 남쪽 아르디노(Ardin- o)에서 태어났다. 교사와 언론인으로 살아가던 그는 1943년 <모피코트를 입은 마돈나>를 발표했다. 그의 첫 작품이자 대표작 인 이 소설은 터키 문학의 시금석(試金石) 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터키 국내에서조차 관심이 없던 작품이었지만, 차츰 그 문학성을 인정받아 지금은 세계 현대문학 고전의반열에까지 오르게 된 작품이다. 베를린과앙카라를 배경으로, 마치 비 오는 날의수채화처럼 펼쳐지는 고단한 청춘의 이야기는 잔잔한 감동을 안겨 준다.
<모피코트를 입은 마돈나>는 1인칭 소설이다. 소설이 조금 특이한 것은 전반부에 등장하는 화자(話者) '나'와, 중반부터 작품을 이끌어 가는 '나'는 다른 인물이다. 전반부의 화자인 '나'가 새롭게 알게 된 친구의유품과 같은 노트 속의 이야기를 담담하게풀어가는 작품이다.
소설은 가을이 깊어가는 터키 앙카라의 거리에서 시작된다. 화자 나는 얼마 전에이유도 모른 채 다니던 직장인 은행에서해고되었다. 나는 해가 뉘엿뉘엿한 시청앞 길을 걷고 있었다.
심란한 마음으로 길을 걷던 나는, 멈춰 있던 승용차의 운전석에 앉아있는 한 사람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동창 하마디(Hamadi)였다. 가끔 봤지만 실직 후에는 만난 일이 없는 친구였다.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야, 어디 가냐?" "그냥 걷고 있어." "타라. 우리 집에나 가자."
나는 엉겁결에 차에 올라 친구 하마디의 집으로 향하게 된다. 하마디는 기계와 목재를 취급하는 꽤 큰 회사의 부임원으로 있는 성공한 친구였다. 집에 도착한 후 하마디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은행은 잘 다니고 있지?" "아니, 그만뒀어." "그럼 지금 어디서 일해?" "그냥 놀고 있어."
하마디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의 어깨를 툭 치며 미소를 지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오늘밤 함께 이야기하며 해결책을 찾아보자."
그날 밤 하마디는 나에게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일자리를 제안했다. 그리고 갑작스런 실직으로 막막하던 나는 그의 배려를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게 화자 나는 친구하마디 회사의 은행 관리 담당 직원으로근무를 하게 된다.
하마디는 나에게 라이프 에펜디(Raif Efe- ndi)라는 독일어 문서 번역가의 방에 자리를 마런해 주었다. 중년의 남자 라이프 에펜디는 까칠한 수염과 회색 머리칼에 굵은갈색 뿔테안경을 쓰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회사 동료들은 그를 마치유령 취급을 했다. 라이프 에펜디는 겁에질린 사람처럼 조용히 앉아 일에만 열중 했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이 없었으며, 반절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늘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나는 그런 라이프 에펜디에게 알 수 없는 강한 호기심을 느낀다. 조심스럽게 접근 하는 나를 처음에는 경계하는 듯했으나, 라이프 에펜디는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시간이 흐르며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져친한 친구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라이프 에펜디가 결근을 하는 일이 일어났다. 며칠 동안 출근을 하지 않고, 번역해야 할 서류가 밀리자 친구하마디가 나에게 그의 집을 찾아가 보라는 제안을 했다.
그의 집은 이스메파사(Ismetpasa) 지역에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열두 살쯤 보이는 여자아이가 문을 열어 주었다. 집안은꽤 넓었지만, 물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어딘가 어수선한 느낌이 들었다. 라이프에펜디의 딸로 보이는 소녀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않아요."
소녀는 아버지가 누워 있는 방으로 안내를 했다. 방에 들어서며 나는 방안의 환경에 깜짝 놀랐다. 여러 개의 침대가 놓여 있고, 실크 드레스, 스타킹, 핸드백 등이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방은 마치 병원의다인실(多人室) 병실을 방불케 했다.
"여기 앉게, 친구. 아이들과 방을 함께 쓰고 있어서...."
나는 라이프 에펜디와 이야기를 나누며 점점 더 놀라운 사실들을 알게 된다. 그는 부인과 두 딸이 한 방을 쓰고, 두 처형 가족 그리고 두 매부 가족이 한 집에서 모여 살고 있었다. 황당한 것은 그 많은 식구들이 라이프 에펜디 한 사람의 벌이에 매달려 살고 있었다.
그의 부인 미히리 하님(Mihriy Hanim) 은 하녀처럼 말없이 온갖 집안 허드렛일을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매는 대가족의 고달픈 집안일 때문인지 나이에 비해변형되었고 늙어 보였다.
라이프 에펜디는 그럭저럭 일상을 회복 하는 듯했지만, 아직 찬바람이 남아있는 2월 어느 날 다시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그의 집을 찾았다. 그런데 라이프 에펜디를 본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며칠 사이에 그의 모습이 마치 죽음을앞둔 환자처럼 병색이 짙은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한 열과 위통으로 고통받고 있다며, 그의 부인은 혼잣말처럼 조용히 말했다.
"도무지 몸을 돌보려 하지 않아요.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밤새 거리를 헤매다가 이렇게 다시 아파 누었어요."
그의 병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금요일, 병문안을 온 나에게 라이프 에펜디는 갑자기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않았다는 뉘앙스의 말을 한다. 그때의 그의 쓸쓸한 모습을 작가는 이렇게 표현했다.
"In Raif Efendi's eyes, I could see a deep and sorrowful smile. 라이프 에펜디의 두 눈에서, 나는 깊은 슬픔의 미소를 볼 수 있었다."
그는 공허한 눈빛으로 천정을 바라보며 나에게 말했다.
"내 바지 오른쪽 주머니에 열쇠가 있는데, 사무실 책상 열쇠네. 서랍에 있는 물건들을 챙겨 갖다주게."
다음 날 나는 사무실에 가 라이프 에펜디 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은 거의 비어 있었다. 낡은 타월 한 장, 신문지에 싼 비누 하나, 음식물 봉지, 포크 하나 그리고 펜나이프 한 개가 전부였다. 나는 물건들을싸 들고 일어섰다. 사무실을 나서려는 순간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다시 서랍 안쪽에 손을 넣어 보았다.
"And there, in the drawer's furthest reaches, was something that felt like a notebook. 그런데, 서랍 깊숙한 안쪽에 노트 같은느낌의 물건이 손에 잡혔다."
나는 부탁한 물건들을 갖고 라이프 에펜디 를 찾았다. 병세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해 갔다. 그의 곁에는 부인과 딸이 지키고 있었다. 병실에 들어서자 라에프 에펜디는 나와 둘이서만 할 이야기가 있다는 듯 두 사람에게 나가 있으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서랍 속의 물건을 가져왔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나에게 들고 온 검은색 커버의 그 노트를, "읽지 말라"라고 말하며 부탁을 했다.
"Throw it in there! 저곳에 던져버리게!"
놀랍게도 라이프 에펜디가 가리키는 곳은 방 안쪽에서 빨간 불꽃을 품어내고 있는난로였다. 나는 그의 예상치 못한 부탁에놀라며 물었다.
"You want me to burn it? 나더러 이걸 태워버리라는 건가?" "Yes. 그렇네."
나는 노트의 내용에 강한 호기심을 느끼게 되며, 나의 손으로 그것을 없애서는 절대안된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정색을하며 라이프 에펜디에게 말했다.
"자네의 그런 부탁은 부끄러운 일이네. 지난 몇 년 동안 누구보다 가깝게 지냈던친구인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하면 되겠는가? 그동안 자네는 내 가장 소중한 친구였네. 그런데, 나는 아직 자네가 많은 것을숨겨야 할 그런 사람으로 남아 있는가?"
나는 라이프 에펜디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눈을 바라보며 간절하게 부탁했다.
"자네의 마음을 다 이해하네. 물론, 자네는 이 노트를 태워버릴 권리도 갖고 있네. 그런데, 하루만 시간을 주면 안 되겠는가? 오늘 밤 자네의 이 노트를 읽어보고 싶네."
"무엇 때문에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려는가"라며 완강히 거부하는 라이프 에펜디 앞에서 나는 눈물로 애원했다.
"Raif, please try and understand me. I am just embarking on the journey that you are close to finishing. I want to understand people. Most of all I want to understand what people did to you. 라이프, 나를 이해해 주기 바라네. 자네가 이제 마치려 하는 여정을 나는 지금 막시작해 보려 하네. 자네와 그 여정을 함께 했던 사람들도 알고 싶네. 그리고 그들과 자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두 알고 싶네."
라이프 에펜디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읽어보게!"
방을 나서려 일어서자, 라이프 에펜디가 손을 내밀어 나의 손을 잡는다. 그 손에 그는 떨리는 입술로 입을 맞추었다.
그날 밤 나는 테이불 위의 램프에 불을밝혔다. 그리고 노트를 열었다. 라이프에펜디의 이야기는 1933년 6월 20일 시작되었다.
(이후의 소설은 라이프 에핀디가 '나'로등장한다. 그 노트 속 '나' 라이프 에핀디가 작품의 실질적 주인공 역할을 하며 줄거리를 이끌어 간다.)
나는 하브란(Havran)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나는 소심하고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였다. 혼자 있는 나에게 유일한 친구는 책이었다. 사업가였던 아버지는 나의 이런 정적(靜的)인 성격에 크게 실망하며 손찌검까지 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읽고 있던 <레 미제라블>이나 <파리의 미스터리>같은 책들을 집어던지며 소리 지르곤 했다.
"Honestly, you should have been born a girl. 솔직히, 넌 계집애로 태어났어야 했다."
아버지의 분노는, 어쩌면, 집안을 이끌어 가야 할 아들에 대한 실망이 너무 컸기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아버지는 나의 교육에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대만큼 나의 학업은순탄하지 않았다. 이스탄불에서 고등학교 를 다니던 시절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나는 학업을 중단하고 군 입대를 해야 했다. 제대 후 나는 복학을 하지만, 끝내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당시 나는 학업에 흥미가 없었다. 다만, 마음속에 남몰래 갖고 있는 꿈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언젠가 화가가 되겠다는소망이었다. 학교를 자퇴한 후, 방황하던그때에도 나는 이스탄불에서 미술 아카데미를 다니며 미술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긴 편지가 왔다. 독일에 가서 비누 제조 기술을 배워 아버지의 공장을 맡아 가업을 이으라는부탁이었다. 나는 기뻤다. 그것은 기술을배운다는 것보다 유럽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는 설레임이었다.
나는 독일어를 전혀 못하는 상태에서, 이스탄불을 떠났다. 불가리아를 거친 긴 여행 끝에 나는 드디어 독일에 도착 한다. 나의 베를린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Part [2]로 이어 마무리 하겠습니다.
김종호
• 위 글은 Sabahattin Ali의 <Madonnna in a fur coat" 영문본을 읽고, 임의 해석을덧붙여 쓴 글이므로 번역본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