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코트를 입은 마돈나 [2]
《 Part [2]의 "나"는 소설 전반부 화자(話者)의 친구이며, 노트의 주인인 라이프 에펜디(Raif Efendi)다. 그가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비누 제조 기술을 배우기 위해 찾아간 베를린에서의이야기다.》
베를린에 도착한 나는 한 펜션(pension: 북유럽의 작은 호텔)에 머물게 된다. 펜션에 묵는 사람들은 국적도 다양했고, 장기투숙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저녁식사 같은 때는 주위가 시끌벅적했다.
처음에는 짧은 문장 몇 마디 밖에 모르던독일어 실력도 시간이 가며 조금씩 발전해 갔다. 오며 가며 마주치는 사람들과 차츰친해지며, 나는 그들과 제법 일상의 이야기를 주고받을 정도가 되었다.
그들 중에서도 독일인 미망인 프로 반타이드만(Frau Van Tiedmann)이라는여인과 제일 가깝게 지냈다. 그리고 포루투칼에서 오렌지를 수입하는 무역업자헤르 카메라(Herr Camera)와, 식민지카메룬과 비즈니스를 하는 헤르 도프케(Herr Doppke)라는 나이 지긋한 사람과 자주 어울렸다.
나는 베를린 생활에 적응해 가며 어느 때인가부터 좋아하는 그림을 보기 위해 박물관을 찾기 시작했다. 그날도 새로운 그림을 전시한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박물관을 향했다. 베를린에 온 지 1년쯤 되는 11월 어느 금요일이었다. 짙은 구름이 낀 하늘에서는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박물관에 들어와 그림들을 감상하며전시실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한 작품 앞에서 발을 떼지 못하고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림은 모피코트를 입은 여인의 초상화였다. 그림 속 여인은기이하고 조금은 두렵게 다가왔으며, 거만 하고 야성적인 모습이었다.
나는 작품을 감상하며 지금까지 한 번도느껴보지 못했던 긴장감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두운 배경의 그림 속 여인은 창백한 은빛 목이 두드러졌고계란형 얼굴은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전시회 팸플릿 페이지를 넘겼다. '모피코트를 입은 마돈나'라는제목과 함께, 안드레아 델 사르토(Andrea del Sarto)의 작품 '성모 마리아'와 많이 닮았다는 짤막한 평이 실려있었다. 그리고 마리아 푸더(Maria Puder)라는 화가의 이름이 보였다.
그날 이후, 나는 마치 마법에 걸린 듯, 머릿속에는 온통 그 그림 생각뿐이었다. 매일 오후가 되면 나는 박물관을 찾아가서성이다 나중에 '모피코트를 입은 마돈나' 앞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펜션으로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림을 출품한 화가들이전시관을 찾는 행사가 있었다. 화가들은 모두 남성들이었는데, 여자 화가가 한 명 눈에 띄었다. 며칠 후 나는 여느 날처럼그림이 있는 전시실 벤치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한 여성이 벤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왔다. 그리고 거침없이 나에게 말을 걸어 왔다.
"It seems you are particularly fascin- ated by this painting. 이 그림에 특별히 매료된 것 같아요."
그녀는 나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You come to look at it every day. 이 그림을 보기 위해 매일 여기에 오고요."
그녀가 말을 걸어올 때, 그녀의 구두를 보고 있던 나는 고개를 서서히 들었다. 그녀는 짧은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다리가 유난히 균형이 잡혀 있다.
"네, 그림이 너무 아름다워서요."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지만, 직감적으로 그녀가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구실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왠지 어머니를 많이 닮은 듯해서...."라고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 그래서 이곳에 와 오랫동안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군요!" "네." "어머니는 돌아가셨어요?" "아니요."
그녀는 나에게 말을 계속해 보라는 듯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멀리 계세요." "어딘데요?" "터키요." "터키 사람이세요?" "네." "난 당신이 외국인인 줄 알고 있었어요."
그녀는 나가 앉아 있는 벤치의 옆자리에앉았다. 다리를 꼬며 앉는 그녀의 행동이조금은 건방져 보였다. 스커트 아래 드러난 하얀 무릎이 눈부시다. 옆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 그녀는 일어섰다. 그런데 저만치 가던 그녀가 갑자기 돌아서 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정말 저런 모습의 어머니를 원하세요?" "네, 그럼요...." "아, 네...."
그녀는 다시 멀어졌다. 나는 눈을 들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짧은 머리칼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목뒤에서 깡충거린다. 양손을 넣은 코트는 그녀의 몸을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동안 줄곧 눈을 마주치지 않아 얼굴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맑고 유쾌한 그녀의목소리만 귓전을 맴돌았다.
나는 베를린에 온 후 가끔 맥주를 마시고 거리를 걷곤했다. 그날 나는 같은 펜션에 함께 사는 미망인 프로 반 타이드만과 바에서 맥주를 마신뒤 펜션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몹시 취해 있었다. 몸을가누기 힘들 정도로 취한 그녀는, 나에게 의지하며 길을 걸었다.
서른다섯의 미망인은 나를 갈수록 더욱세게 끌어당겼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가 나에게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굶주린 듯한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뜨거운 숨소리와진한 알코올 향이 전해져 왔다. 행인 몇 사람이 소리 내어 웃으며 "행복하세요"라며 지나갔다.
그녀에게서 벗어나려 애쓰던 바로 그때였다. 열 보쯤 떨어진 저 앞에서 한 여인이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희미한가로등 불빛 아래 드러난 그녀의 실루엣은 ... 창백한 얼굴, 오뚝한 콧날, 짙은 눈동자 그리고 모피코트를 입은 모습은 분명히 그림 속 마돈나였다. 그녀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미소를 짓더니 우리를 뒤로하고 멀어져 갔다.
그날 밤 나의 뇌리에서는 가로등 밑에서 만났던 그림 속 마돈나를 닮은 여인이 떠나지 않았다. 다음 날 밤이 되자 나는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그녀를 만났던 놀런도르프광장(Nollendorf Square) 주위 골목길을서성였다.
나는 드디어 그녀를 만났다. 그날 어둠이 내린 베를린의 밤거리는 인적이 뜸해지며, 가끔 제복을 입은 경찰들의 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분명히 그녀였다. 그녀가 저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길가에 있는 건물 문 뒤로 몸을 숨겼다. 그녀가 지나간 후 나는 그녀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에 가슴은 마냥쿵쾅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따라가던 나는 갑자기네온 불빛으로 거리가 환한 곳에 나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위쪽에는 유명한 카바레 '아틀란틱(Atlantic)'의 푸른색 네온사인이 눈부시게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카바레의 문앞을지키고 있는 도어맨에게 다가가 물었다.
"Did a woman in a fur coat walking ahead of me go inside? 내 앞에 가던 모피코트를 입은 여자가 이 안으로 들어갔나요?"
도어맨은 사연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코트를 벗어들고 무작정 안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홀에는 많은 손님들로 붐볐다. 중앙에는원형의 댄스장(Dance Floor)이 있고, 그뒤쪽에 오케스트라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벽을 따라 룸(밀실)들이 있는데 대부분 커튼이 내려져 있었다. 가끔 커풀들이 댄스장에서 한참 동안 춤을 추다가룸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홀안을 둘러봤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나는 그녀가 룸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카바레의 야릇한열기와 어둑한 조명 아래서 조금씩 자조적(自嘲的)인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를 밤잠 못 자게 하고, 성(聖)스럽기까지 했던 모피코트를 입은 마돈나가기껏 이런 카바레나 드나드는 여인이었단말인가"라는 실망감이었다.
베를린에는 수많은 여인들이 모피코트를 입고 있을 텐데, 얼핏 그림 속 여인과 닮았다는 이유 때문에,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 한심하다는생각까지 들었다. 더 이상 여기 앉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할 때였다.
홀 안이 어두워지며 오케스트라 쪽으로희미한 조명 불빛이 비치었다. 곧 느리고 무거운 멜로디와 함께 가느다란 바이올린선율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남성 목소리에 가까운 저음의 여성 노랫소리가 뒤를따랐다.
이곳까지 뒤를 밟으며 따라왔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참담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노래하며 관객들에게 교태스러운 웃음을 보내는 그녀에게서 그림 속의 도도하며 강력한 나의 마돈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노래를 듣고 있던 나에게 전혀 예기치 않은 감정이 밀려왔다. 아름답고애처로운 그녀의 목소리가 영혼의 위로함 처럼 다가왔다. 그녀는 바이올린을 켜며술 취한 사람들로 떠들썩한 테이블을 하나 하나 돌며 인사를 했다. 움직일 때마다하얀색의 긴 가운이 쪽마루 바닥을 스치고 있었다.
그녀가 나의 테이블 쪽으로 걸어오자, 나는 온몸이 얼어붙는 페닉 상태에 빠졌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강렬하면서도 부드러웠다.
"That false smile was gone. But in her eyes I could read a warm greet- ing. Yes, I could. Without pretence, and without moving her lips, she was greeting me like an old friend. (조금 전의 그 교태스러운) 거짓 웃음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나는 그녀의 눈 속에서 따뜻한 반가움의 표현을 읽을 수 있었다. 정말 그랬다. 어떤 꾸밈이나 말도 없이, 그녀는 나에게 오랜 친구를 대하 듯 인사를 했다."
나는, 마치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보는 듯한 가슴이 활짝 열리는, 뜨거운 환희의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따뜻한 말한마디와 꾸밈없는 미소가 이처럼 위대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다음날 어둠이 내리자 나는 서둘러 카바레 '아틀란틱'을 다시 찾았다. 내가 붙들지 않으면, 어쩌면, 이 행복도 허망하게 사라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안고 발걸음을 재촉 했다.
그녀가 오케스트라 뒤쪽 룸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그녀는 다시 홀로 나왔다. 오늘은 손에 바이올린을 들고 있지 않았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나의 방향으로 오고 있었다.
처음 나는 "주위의 다른 테이블에서 그녀를기다리는 사람이 있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곧장 나의 테이블로 걸어 왔다. 그녀는 손을 내밀며 인사를 했다.
"How are you? 안녕하세요?"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움을 억제 하며 대답했다.
"Thank you... I'm fine. 감사합니다. 네, 좋아요."
그녀는 내 앞자리에 앉았다. 뒷머리를매만지며 그녀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 보았다. 그리고 가까운 친구에게 말하듯 물었다.
"Are you angry with me? 나에게 화났어요?"
나는 화들짝 놀랐다. 다짜고짜 "화났냐?"라고 묻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웬일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낯이 익고 친숙하게다가왔다.
"But her voice...most likely I had he- ared it before. Somewhere... maybe long ago, in my childhood... maybe only in my imagination. 그녀의 목소리... 전에 분명히 들어본 듯 했다. 어디선가... 오래전 어린 시절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상상 속에서 들었던 목소리 같기도 했다."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당황하고있자, 그녀가 나에게 다시 물었다.
"Does your mother write to you? 어머니께서는 편지를 보내 주시나요? "
나는 전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나,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Oh, my God, it was you? 아- 당신이었군요."
나는, 드디어, 그녀의 목소리를 기억해냈다. 박물관에서 나에게 뚜벅뚜벅 걸어와 말을 걸었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그림을 보면 어머니가 생각난다고 말해 주었던 그 여인이었다.
나에게 손을 내주고 있던 그녀는 밝게웃으며 말했다.
"You really are a strange youngman. 당신은 정말 이상한 젊은이군요."
바이올린을 들고 노래하는 이 여인이 '모피코트를 입은 마돈나'를 그린 화가 마리아 푸더(Maria Puder)였다. 그녀는 나가 잡고 있는 손을 살며시 빼며 물었다.
"아직도 그림 속 여인 같은 어머니를 원하세요?" "네, 아마..." "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요?" "아, 아닙니다."
그림 속 여인이 자신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나는 엉겁결에 "몇 살이세요?"라고 물었다. 그녀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밝게웃는다.
"Now how can you ask a question like that? All the same, I'm twenty-six ... You?" 어떻게 (여자한테)그런 질문을 할 수 있어요? 어쨌든, 스물여섯... 당신은요?
"Twenty-four. 스물넷이요."
"You see? I could be your sister. 그래요? 내가 누나군요."
"Yes... 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것은 어색하거나불편한 침묵이 아니었다. 유쾌한 정중동(靜中動)의 시간이었다. 나는 무슨 일인지 그녀에게 할 말이 산처럼 쌓여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금 머릿속에는 한마디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녀도 말없이 홀저쪽을 바라보고 있다. 호수처럼 고요하고봄처럼 따뜻한 눈빛으로....
• 당초 Part [2]로 마무리하려 했으나, 요약이 어려워 Part [3]로 끝맺겠습니다.
김종호
• 위 글은 Sabahattin Ali의 <Madonnna in a fur coat" 영문본을 읽고, 임의 해석을덧붙여 쓴 글이므로 번역본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